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김오수 부장검사)는 지난 2일 가요대상 수상자 선정과 관련하여 1억4500만원을 받고, 우회상장 직전의 팬텀엔터테인먼트 주식 2만주를 헐값에 사들인 혐의를 받고 있는 KBS 박해선 전 예능팀장을 자택에서 전격 체포했다. 박 PD는 배임수재 혐의로 4일 구속됐다. 5개월 가까이 수배 중이던 박 PD가 구속됨으로써 ‘PD비리’ 사건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방송사의 간판급 예능 PD 8명이 기소되고, 그 중 3명이 구속된 치욕적인 사건이다.

▲ 2월 4일자 세계일보 12면.
이번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이 자체 선정한 2008년 10대 특수수사건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고, 만만치 않은 파장을 던졌다. 검찰의 표현대로라면 ‘국민의 전파를 사리사욕에 이용한 반사회적 범죄’를 단죄한 것이고, 조선일보의 해석대로라면 ‘업계에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계기였다.

그런데 잠깐, 정녕 그러한가? 이제 전파는 사리사욕 대신 공리공욕에 이용되고 있지는 않나. 자본력을 가진 소수의 연예기획사들의 영향력이 날로 강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얼핏 이해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수사 당시의 호들갑에 비해 썰렁하게 줄어든 기사들이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뭔가 바짓가랑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워낙 시절이 하수상해서인가 했다.

얕은 호기심으로 파고들어봤다. 하지만 ‘PD비리’ 사건은 꽤 넓게 걸쳐있는 고구마 줄기였다. 그래서 이름도 붙여봤다. 이름하여, <PD비리 사건 제대로 감상하기!> 어느 영화 제목을 패러디 하자면, “여의도에서 돈 받았다가 잠적한 PD 여태 여의도에 있었다.”

이번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개념 탑재가 필요한데, 기초적으로는 시간개념(시간에 대한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개념)이 좀 있어야 하고, 심화시키려면 공간개념(공간에 대한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개념)이 필수적이다. 물론, 누군가들처럼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것이 아니라면 겁먹을 만큼 어렵진 않다.

시간개념 :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날짜들.

지난해 8월17일, 검찰은 주요 방송사 현직 국장 및 간판급 PD들이 연예기획사들로부터 주식과 돈을 받은 혐의가 있다며 전격적으로 이들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관공서는 쉬는, 법정 공휴일인 일요일의 일이었고 더욱이 15일 광복절이 금요일이어서 연휴기간이었다. 출석을 요구했다는 기사에는 금품 수수 규모가 크고 대가성이 짙은 PD들은 선별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라는 입장이 함께 전해졌다. 날짜를 주목해야 한다. 염천 더위에, 연휴도 쉬지 않고 일했던 것일까? 왜 하필 ‘8월17일’이었을까. 그것도 ‘일요일’이었을까.

▲ 2008년 8월 18일자 조선일보 10면.
검찰의 캐비닛(혹은 하드 디스크)에는 조금만 손을 보면 언제든지 ‘사건’을 만들 수 있는 기획들이 무궁무진하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범죄정보의 모든 것이 거기 있다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검찰은 부지런하고 능력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 약간 꼬아보면, 예능 PD 비리 사건 정도는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게 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즉, 대중적 폭발력이 매우 강한 사건을 언제든 캐비닛에서 꺼낼 수 있는 힘을 지닌 검찰이다. 일련의 기획성 수사사건은 그래서 등장 시점의 국면이 매우 중요하다. 과연, 8월17일 전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8월이면 촛불은 아직 살아있을 때이다. MB의 언론장악 시도가 적나라해지며, YTN 낙하산 사장 저지 투쟁이 들불 조짐을 보일 때이다. 계속, 날짜를 주목해보시라. 8월5일 감사원은 ‘비리’가 아닌 ‘비위’라는 생소하고 기능적인 이유를 들며 정연주 KBS 사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워낙 예측된 상황이었던지라, 곧장 6일 530여개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은 ‘이명박 정권의 KBS 장악저지’를 위한 집중행동에 돌입했다. KBS 앞에서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틀 후인 8일 KBS 이사회는 그들만의 회의를 통해 정연주 해임 제청안을 통과시켰다. 이즈음에 여야는 KBS 사장을 해임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논쟁을 벌였고, KBS 사장 해임 사태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리고 12일에는 정연주 사장이 검찰에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약속이라도 한듯, 13일 KBS 이사회는 후임 사장에 대한 공모 절차에 돌입했다. 여론 따위 고려않는 일사천리의 진행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검찰이 ‘PD비리’ 사건을 던졌다.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 것인지, 배 떨어지자 까마귀가 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일요일이었을까?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라면 검·경은 일요일에도 긴급하게 브리핑을 한다. 요즘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 때문에 다시 거론되고 있는 2004년 유영철 사건의 경우 경찰은 일요일 아침에 첫 브리핑을 했다. ‘PD 비리’ 사건도 그처럼 화급한 사건이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PD 비리’ 사건은 전형적인 기획수사다. 수사 당국은 얼마든지 발표시점을 조절할 수 있고, 이런 사건일수록 발표에 앞서 엠바고를 요청하는 등 기자단과 발표시점을 조정하는 게 관행이다. 일요일은 기자단이 매우 선호하는 요일이기도 하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작동되어야 하는 특수한 분야가 아니면 국가 전체의 공적 업무가 중단되는 이날도, 신문과 방송은 지면과 뉴스시간을 메워야 한다. 그래서 언론은 댐에서 시기를 조절하며 물을 방류하듯이 일요일용 기사거리를 비축했다가 풀어놓는다. 일요일 방송뉴스에 법원 판결기사가 유독 자주 나오는 사정도 거기에 있다. 일요일에 법원은 쉰다. 그리고, 일요일에 발표되는 사건은 대서특필되기 마련이다. 기사거리가 많지 않은 날이므로.

공간개념 : 여의도에서 돈 받았다가 잠적한 PD 여태 여의도에 있었다

어제 구속된 박해선 PD는 수사 당시 KBS 예능1팀장이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잠수 탔고, 바로 지명수배됐다. 지명수배 조치가 내려지기 직전 KBS는 잠적 중이던 그를 시청자서비스 팀원으로 인사 조치했다. 그러곤 지명수배 된 이후에도 몇 개월째 회사에 나오지 않자, 직권휴직 조치했다. 당시 KBS노조는 “회사 명예를 훼손시키고 몇 개월째 출근하지 않은 박 PD에 대한 회사의 조치가 상식과 사규에 어긋난다”고 주장했지만, 회사 쪽은 “박 PD에게 소명기회를 주지 않고 면직시킬 수 없다”고 맞섰다.

그로부터 5개월여가 지나고, 그 사이 한국 사회에는 말로는 다 못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파렴치한 PD 몇명이 구속된 일 따위는 도저히 기억할 만한 꺼리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새 모두가 잊고 지내던 지난달 14일, 박 PD에 대한 권고 휴직도 끝났다. 박 PD는 여전히 수배 중이었지만, KBS는 박 PD를 정상 복직시켰다. 박 PD는 멀쩡히 출근했단다. 식스센스를 능가하는 섬뜩한 반전. 잠적했던 그 PD, 여태 거기 KBS에 있던 셈이었다.

▲ 2월 4일자 조선일보 12면.
KBS는 응당 거쳐야 할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여러 명이 개입되었기에 실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아서 벌어진 단순 실수였을까? 아니면, 조선일보도 의아해하는 것처럼 뭔가 조직적인 비호가 있었던 것일까? 알 순 없다. 지금 KBS는 출입 등록이 되어있는 기자들마저 취재를 못하게 하는 야박한 공간이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으니 정확한 ‘사실’을 알긴 어렵다.

굶주린 승낭이 몇 마리 쫒아낸 초원을 접수한 극악한 하이에나떼

다만, 정리된 ‘진실’이 존재할 뿐이다. 비리 사범을 옹호할 맘은 추호도 없다. 다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지난해 8월17일의 ‘PD 비리’ 사건이 이렇게 참을 수 없이 우스꽝스러운 ‘활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이 씁쓸할 뿐이다.

방송을 특히, 당시 KBS를 ‘비리의 온실’로 낙인찍으려 했던 이유와 그 효과가 이렇게 얕은 수였을까. 검찰은 몇몇 질 나쁜 PD들에 대한 기획 수사를 통해 정권의 언론 장악을 은폐하고 대중적 관심을 전환하는 효과적인 꽃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파렴치범이라 불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쁜 PD 몇몇은 ‘구질서의 악덕’으로 지목됐다. 그 숙청의 스펙터클이 지렛대가 되어 아예 질서 자체가 해소됐다. 정연주 전 사장은 해임됐고, 이병순씨가 새 사장에 임명됐다. 그런데 철없는 PD 한 명이 잠수를 탔다. 그리고 5개월 만에 버젓이 회사에 출근했다. 국민의 전파를 사리사욕에 이용한 반사회적 범죄자이자, 업계를 추악하게 만든 장본인을 신고해야 마땅할 텐데, 새 질서의 KBS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KBS이사회 개최를 막으려 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원행동 쪽 PD와 기자를 파면·해임까지 시킨 KBS의 ‘민감성’은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다. 새로이 등장한 질서는 구질서에 비해 수십 배는 더 악덕해진 상황이라 이제는 ‘말로는 다 못할 정도’라는 표현이 부족할 지경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 드넓은 초원을 방황하던 굶주린 승냥이 몇 마리 쫒아내고, 초원 전체를 극악한 하이에나 무리가 장악한 상황이 떠오른다. 철없던 PD는 돌아왔는데, 쫒아내야 한다는 사실 조차 이젠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질서가 교체된 상황이라 활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일까? 먼저 구속된 2명의 PD는 석방되었나?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룸살롱 접대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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