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4년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문화채널 아르떼(Arte, Association Relative à la Télévision Européenne)는 한 자사 프로그램의 100회 방송을 기념해 당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 콜 총리의 공동 인터뷰를 추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방송사 사장이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에게 인터뷰할 기자들의 명단을 제출해 독일 기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독일의 한 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기자 한 명을 선택하기 위해 총리와 협상하는 것은 독일에서 저널리즘의 독립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방송국은 한술 더 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몇몇 기자를 골라 인터뷰에 참가하라는 ‘소환장’을 발송했다. 대통령과의 인터뷰가 까다로운 우리로서도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이런 절차가 프랑스 사회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저자가 감탄할 정도로 솔직하다고 평한 방송사 사장의 변(辯)은 “프랑스에서는 질문을 할 기자들의 선택에 대해 미리 엘리제궁과 토론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여론과 권력 사이에 놓인 기자라는 존재는 과연 어느 쪽을 위한 ‘안전밸브’인가? 저자는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창업자인 위베르 뵈브 메리의 “저널리즘은 접촉과 거리감이다”라는 정의를 인용하면서, 오늘날 언론에는 ‘접촉’만 있을 뿐 ‘거리감’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이른바 ‘폴리널리스트’(polinalist)일 것이다. 기자 경험을 정계 진출의 지렛대로 삼는 이들은 정-언 유착의 상징적 존재로 간주된다.) 권력을 잡은 세력의 이념 편향과 프로파간다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들의 출현은 여론과 권력 사이의 거리감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기자는 갈수록 여론이 아닌 권력을 위한 ‘안전밸브’가 되어 권력이 마련한 여론과의 ‘화해’ 작업에 동원된다. 이를 위해 ‘경계하기’를 멈춘다. 육식세계에 내던져진 기자들은 정해진 생존의 법칙을 체득한다. “종종 사냥꾼이기보다는 사냥감으로. (…) 기자들은 결정이 자신들에게 속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 권력에 대한 거리감을 상실한 이 시대 언론의 현실을 저자는 ‘해바라기 성향의 저널리즘’으로 규정한다.

▲ 프랑스 제1텔레비전(TF1)의 간판 앵커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지난 1993년 7월의 어느 날, 프랑스 제1텔레비전(TF1)은 저녁 8시 메인 뉴스에서 사주인 부이그의 사망 소식으로 뉴스를 시작해 무려 25분을 사주의 업적을 찬양(“훌륭한 사장”, “불굴의 건축가”, “전례가 없는 경력”)하는 데 할애했다. (프랑스의 TF1은 지난 1987년에 민영화돼 현재 부이그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당시 민영화의 이유가 ‘권력으로부터 더욱 독립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프랑스 언론 고유의 환경을 감안한다 해도 TF1 민영화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돌이켜보면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5년 11월, 역시 프랑스 TF1의 8시 뉴스는 뇌물 사건에 연루된 자사의 사주 파크리크 르 레에 대해 프랑스 법원이 보호관찰 판결을 내린 사실을 방송하지 않았다. 또 같은해 12월, 창업자의 아들인 사주 마르탱 부이그가 회사 자본금 유용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사건을 놓고도, TF1은 저녁 8시 뉴스에서 고작 두 차례 언급했을 뿐이었다. 간판 앵커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의 멘트는 19초, 관록의 기자 클레르 샤잘의 뉴스는 13초였다. 클레르 샤잘 기자는 1년 전,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총리께서는 검사들이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에게까지 집요하게 추적하는 바람에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사주에게 한껏 고개를 조아리는 사유화된 프랑스 언론 현실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제철소위원회의 유산’으로 표현된다. 프랑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비 조달의 핵심이었던 제철소위원회는 여러 일간지를 통제하며 프랑스 언론을 돈으로 좌지우지했다. 저자는 프랑스 언론 역사에서 그 끔찍했던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났다고 말한다. 우리 민영방송에서도 사주와의 거리감이 무너진 뉴스를 종종 접할 수 있지만, 거대 방송사가 사기업의 지배 아래 복속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부이그 그룹 사건은 정말 무섭도록 생생하게 보여준다. 규제를 푼다는 명분으로 갈수록 많은 신문과 방송이 사기업의 손에 넘어가는 현실을 개탄하며 저자는 ‘자본 앞에서 신중한 언론’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지난 세기 동안 언론의 자유는 언론을 소유한 사람에게 속해 있었다. 언론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침묵’이었다. 권력의 추구, 자본 앞에서의 신중함, 이런 것들이 저자가 언명하는 ‘시장 저널리즘’의 근간을 이룬다.

▲ 저자인 세르주 알리미
걸프전과 마스트리히트 조약, 가트 협약, 쥐페 법안 등 사회적 찬반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 대한 모든 언론의 목소리는 동일했다. 철두철미한 공모(共謀)의 세계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기자들이 갈수록 보수화되고 특권층의 이익에 가까워지는 프랑스에서는 소수의 ‘잘 나가는’ 기자들이 이런 공모를 공고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 저명한 지성에 대해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실명으로 비판한 이 책의 4장은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움을 준다. 예컨대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이야기로 말문을 돌리면서 서로서로 합의된 상찬을 공유하는 따위가 가능한 것은 논단의 겸직과 ‘겹쳐진 의전’이 이들에게 단단한 카르텔의 난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얽힌 이 단단한 핵심 분자의 조직망은 진한 애정으로 얽혀 있”으며, “언론계의 거물급 기자들은 단단한 핵심 분자로서 기능한다.” 마침내 저자는 선언한다. 체계가 고장 났다!

이것이 전 세계에서 여론 다양성을 가장 강조하는 나라 프랑스의 현주소다. 프랑스 철학자 폴 니장은 저서 <충견들>에서 “미슐랭(프랑스 타이어 제조업체 ‘미쉐린’의 창업주)씨는 자신이 없으면 죽게 될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만 타이어를 제조한다는 사실을 믿게끔 해야 했다”고 적었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이후부터 특히 변한 것은 기자들이 미슐랭씨처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감시견(watchdog)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공모의 침묵’에 빠진 기자들, 권력가들의 이권에 고용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권력의 견제 세력’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집 지키는 개들’이다. 미국식으로 소개되는 기자의 책무 : 고뇌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안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공고했던 저널리즘의 원칙은 차츰 잊히더니 언제부턴가는 퍽 낯설어져 버렸다. 프랑스 현실이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규제완화=민영화를 세계적인 추세로 받아들이는 권력 앞에서 우리 언론이 처한 위기는 프랑스 언론이 걸어온 ‘몰락’의 공식을 갈수록 닮아가고 있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저서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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