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시대라는데…

불쑥 언급하기가 다소 진부한 주제이지만, 우리는 이 시대가 ‘문화의 시대’라는 표현을 종종 듣고 접하곤 해왔다. 수많은 담론들이 문화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고, 높아진 (대중)문화와 창의산업(creative industries)들의 위상을 고려하거나, 일상 속에서 문화와 관련한 수많은 이슈들이 포장되어 대중에게 소개되고 유행과 취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돌아본다면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문화경제론에서 소프트파워론, 문화컨텐츠학의 부상, 라이프스타일과 웰빙이라는 유행어의 범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시를 들 수 있다. 대중문화나 예술을 전공으로 삼는 지식인이나 학자들만이 아닌 정책입안자와 관료, 그리고 정치인들도 이 표현을 언제부터인가 자주 애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소 원론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많은 이들이 이미 언급했듯이, 문화라는 존재는 정의하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으며 매우 복잡하고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막상 명쾌한 정의를 제시하는 일은 절대로 만만치 않다. 동시에 문화라는 대상은 정치, 경제, 테크놀로지, 일상 등의 영역을 수시로 드나들며, 문화 아닌 것들과 활발한 상호작용 그리고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특징 역시 문화를 접근할 때 고려하여야 한다.

몇 가지 사례를 한번 들어 보자. 문화는 전통과 관습 혹은 관념과 같은 정신적인 영역과 종종 연계되거나, 라이프 스타일이나 패션 혹은 문화트렌드와 같은 보다 가시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비교적 많은 이들이 체험하거나 공유할 수 있는 영역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문화가 디자인이나 어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만나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이나 이벤트로 변신할 때와, 문화가 비교적 무형의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습속을 규정하는 주요한 질료이자 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의 차이 역시 일정하게 차별화할 수 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문화가 교양이나 지식으로 종종 추상적인 수준에서 표현되고 다루어질 때와, 의례나 관습 혹은 규범적인 대상과 영역들을 지칭할 때, 그리고 특정 상품이나 콘텐츠 혹은 현상을 매개로 대중적인 삶 속에서 광범위하게 스며들고 향유될 때의 차이가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소수가 향유하는 고급문화에서 다양한 배경과 취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수용되는 양식들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수용자를 중심으로 한 갈래와 문화가 정의되는 방식 상의 차이들을 크게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신세대’나 ‘7080’의 문화 등으로 예시되듯이, 세대는 아마도 가장 흔히 사용되는 나눔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조금 다르게 특정한 장르를 중심으로 본다면 - 대중문학에서 오페라와 뮤지컬, 영화와 아방가드 예술이나 온라인 공간에 등장하는 시각광고에 이르기까지 - 문화의 결과 존재양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강단에서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을 강의하는 필자 역시 때때로 문화의 정의를 내려달라는 학생들의 주문을 받으면 늘 긴장하게 되고, 일정한 부담과 더불어 상당한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 문화에 대해 현재 발현되고 있는 많은 관심은 과거의 경험을 생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측면을 담고 있다. 기억하는 독자들이 꽤 계시겠지만, 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정치나 경제에 종속되거나, 종종 이들 사안들에 밀리는 부차적인 가치만을 인정받곤 했었다. 예컨대 전통문화와 농촌문화의 일부는 개발지상주의의 관점에서 홀대와 무시를 받았고, 나아가서는 우리사회가 정체되는 한 요인으로 지목되어 타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전통문화의 일부이자 지배적인 문화였던 유교문화와 같은 대상은, 주로 식자층을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이루는 데 공헌하는 중요한 정신적인 질료이자, 때로는 우리 사회 내 집합주의와 권위적인 측면을 형성해낸 주요한 원인이란 상반된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거의 문화를 바라보는 측면이 관념과 정신적인 영역에 주로 치중되었다면, 이제 문화는 소비와 생산의 주요한 구성원이자 동력으로서 보다 격상된 대접과 평가를 받게 되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문화도 돈이 되고, 문화를 운위하는 것은 있어 보인다는 사고의 반영이 지배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금은 정체기를 겪고 있다고 보이지만, 한때 아시아 권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한류현상이나, 현재 정책실행자들과 미디어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는 도심개발과 도심 르네상스화에 구호로 들어가는 이른바 “문화도시론”과 같은 예들은 문화가 부가가치의 (재)생산에 필수적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문화 관련 담론과 키워드들이 상당한 활용성과 쓰임새를 기반으로 복수의 사회집단들에 - 특히 정치인과 지식인 그룹에 -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시사해준다.

후자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 보련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들어 자주 문화도시, 창의 시정과 같은 거창한 구호들이 도심재개발을 상징하는 화두로 강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발상은 서구의 일부 성공사례를 모방하기 바쁜 행정가들의 개발우선적인 면모와 디자인과 건축을 결합시킨 ‘대작주의’(monumentalism)로 정치적인 승부구를 던져보려는 정치인들의 야심이 결합된 사례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도시의 문화를 다양한 집단이 형성하는 삶의 현장감과 생동감으로 접근하고, 시간의 켜가 축적되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도시성과 도시문화의 독특하고 고유한 단면들을 창조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개발정책에서 좀체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특정 공간에다 무엇인가 근사한 디자인과 재질로 된 랜드마크를 짓거나 눈에 띄는 아이콘을 설립하는 것이 개발과 성장의 구심점이 되고 문화와 디자인을 결합시키는 일이라는 발상이 때론 진취적이고 대중에게 환영을 받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노쇠해가고 경쟁력을 상실하던 빌바오시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어 수많은 방문자들을 찾아오게 만든 성공사례나 기능이 다한 발전소를 매우 인상적인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테이트 모던의 창의적인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일정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낡고 남루한 느낌이 나거나 혹은 모던한 외양과 시설을 지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심 속에 축적되어 온 역사적이고 공간적인 결과 시민들의 애환이 배인 장소들을 개조와 청산의 시각으로 대하는 것은 기실 매우 문화적이지 못한 일이다. 문화도시론과 도심개발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대문 구장도 이미 잃었고 종로의 피맛골도 사라져가고, 인사동에는 상술로 치장된 박제된 전통의 재현물이 늘어난다. 도시의 장소성을 대안적으로 접근하는 공간인식은 전반적으로 부재하다. 다소 과장하자면 600년이 넘는 수도라는 서울의 도회공간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뚝 우뚝 솟아나는 주상복합물과 가로에 들어서는 서구풍의 카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들어서는 터의 맥락에 무심한 번쩍이는 외관과 방문자를 위압적으로 압도하는 건축물들이 늘어나는 한편, 세월의 족적과 내음이 어우러진 장소들과 사람들이 도시를 무대로 살아온 삶의 양식과 몸짓이 녹아든 거리와 동네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미디어를 통해서 재현되는 공간의 문제 역시 문화가 현재 활용되는 양태들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시사점들을 던져준다. 주지하다시피 대중문화와 영상장르가 선호하는 공간은 이미 상당기간 동안 한국이라는 특정 지역의 장소성과 특질이 균형적으로 발현되기 보다는, 다국적이고 모던한 도회적인 공간들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예를 들어, 트렌디 드라마나 로맨틱 코메디 혹은 퓨전 장르물 등의 경우, 등장인물들이 주거하고, 활동하는 공간들은 주로 서구화되고, 쾌적하며, 흔히 말하는 스타일과 이미지가 세련되거나 혼합된 곳들이 종종 등장해왔다. 물론 이들 영상물 속에 나오는 안팎으로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소비와 여가공간들이나 주상복합물과 같은 매우 근대적인 주거양식들은 한국사회의 일부 상류층 그리고 전문가 집단들에게는 친숙하고, 실제로 그들이 거주하고 활용하는 공간 점유 양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수용자의 입장에서 영상문화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공간들을 접하며 그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삶과 노동의 모습을 진하게 느끼거나 연계시키기란 어렵다. 넓은 의미의 다큐멘타리적인 성격의 프로그램이나 일부 시사교양물을 제외한다면, 중하층에 속하는 이들이나 한국 사회 속 소수자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노동을 영위하는 공간을 수용자는 드물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매체 속의 공간들은 전반적으로 특정 장르의 모양새 혹은 서사의 진행을 보강해주는 장식적인 역할을 하거나, 종종 단순한 배경막에 머문다. 이러다 보니 삶의 땀내음과 숨결이 느껴지는 장소성과 대안적인 공간의 가능성들을 미디어 텍스트 속에서 재현해 보고자 하는 관심은 간헐적으로만 시도되고, 우리는 종종 미디어 속의 화려하고 멋지지만 보통사람들의 삶과 공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거리탐방에서 느끼는 문화의 존재감

그렇다면 쉽진 않지만, 어디서 또한 어떤 방식으로 문화를 도시공간과 삶의 공간 속에서 활용하는 대안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 먼저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소 상투적으로 들리지만, 문화를 먼 곳이 아니고, 자신의 주변에서 능동적으로 찾아보고, 체험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말해 보고자 한다. 얼마 전 취미로 삼는 사진 찍기도 실행할 겸 또한 도회의 네온과 군중을 잠시 떠나 걷기를 실천할 겸해서,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했던 드라마 속의 배경으로도 이용되었던 대학로 뒤편 낙산공원으로 향한 적이 있었다.

젊은 세대가 거의 독점하듯 점유하는 대학로의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하지만 어딘지 지나치게 꾸며 놓은 듯한 거리와 상점들을 지나 언덕길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좀체 보기 어려운 정경들이 눈앞에 문득 들어왔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다양한 색감의 꽃이 그려진 멋진 계단과 아무것도 없었다면 심심하고 눈길을 끌기 어려웠을 벽에 붙인 크고 작은 타일에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그려 놓은 모습들, 그리고 예기치 않게 골목을 돌아서면 눈에 들어오는 벽화들이 놀라움과 더불어 걸음을 멈추고 이 작업들을 한동안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제공해 주었다. 그곳에서 필자는 이제는 사진동호회의 온라인 사이트에도 종종 올라오는 생활공간 속에 자태를 드러내는 공공예술의 존재감을 조용히 느낄 수 있었다. 진작 올 것을 하고 약간의 후회도 될 만큼 낙산공원 주변의 사위는 여러모로 훌륭했다. 골목길을 지나 낙산공원의 상단부에 이르자 공원과 산책로, 그리고 복원된 성벽이 필자를 맞았다. 드문드문 산책을 하는 이들과 운동기구를 쓰는 이들이 있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체험하게 되는 파노라마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불과 십 여 분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언덕길과 이젠 서울주민이면 좀체 접하기 쉽지 않은 꼬불꼬불한 골목과 촘촘히 자리 잡은 집들 사이로 전시실과 갤러리의 액자 안에 가두어지지 않은, 거리와 생활공간의 일부를 창의적으로 그리고 기발하게 이용한 예술작품들이 조용히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필자에게 이제 몇 남지 않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메갈로폴리스 속 달동네의 모습을 낭만적으로 - 혹은 외부자의 시선위주로 - 그려내는 것은 아닌가하고 채근할지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 전에 낙산공원 부근으로 탐방을 한번 나가보고 판단해도 늦진 않으리라. 반드시 대단하고 볼거리가 많은 ‘거리의 미학’이나 참가자들의 열기가 체감되는 축제공간이 아니라 해도, 소외되고 개발에서 비껴간 동네가 뜻있는 예술가들의 참여로 이렇게 작지만 정감이 가는 변화와 문화적 공공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과, 사람이 살고 있는 풍경 혹은 중장년층이라면 그들의 유년시절에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삶의 모습들을 시간을 건너 뛰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방문할 충분한 가치를 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접하는 전통성과 풍물에서 박제된 인상을 받는 이들이라면, 고급스럽고 분위기가 좋은 삼청동의 거리가 언제부터인가 과도한 치장으로 어딘가 불편함을 준다고 느끼는 이들이라면, 혹은 성장하면서 아파트 단지를 동네로 삼아온 이들이라면, 운동화끈을 다시 매고 아직 서울 속에 남아 있는 골목길과 산동네 탐방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설혹 타인의 주거환경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산책가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근대화의 과정 속에 시간이 남긴 자취와 그곳을 기반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일구어 온 삶의 문양들을 발로 누비며 접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곤 돌아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가 변화해 온 궤적들, 특히 (재)개발과 이주 그리고 생존과 소외의 이야기들을 담은 책과 기사들을 찾아보자. 거리와 골목의 탐방이 작지만 유의미한 문화적인 실천의 일부가 되고, 도시라는 복잡한 텍스트의 한 단면을 읽어내고 알아보고자 하는 작업들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문화연대는 문화권리 앞에서 예민하고 당당한, 당신의 불온한 상상력과 진보적 감수성을 위한 동반자이자 놀이터입니다. 국민 모두가 문화권리를 실현하고 문화민주주의가 확대되는 문화사회를, 문화연대는 고민하고 실천합니다. '억압이 아닌 자유','차별이 아닌 평등','경쟁이 아닌 평화,'가 우리 삶에 보장되고, 문화를 둘러 싼 사회적 공공성과 다양성이 확대되고 시민과 민중의 일상적 삶의 권리가 마침내 실현되는 그 순간을 위해 문화연대는 문화사회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발칙한 행동을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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