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일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끔찍한 일들이 독버섯처럼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절이다. 이럴 때는 뉴스를 보기가 두렵다. 죽음의 소식들은 어쩌면 그것에 무뎌질 만큼 혹은 하나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도 없이 너무 자주 우리를 찾아들고 있다. 세상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소식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가끔씩 분위기 파악 못하고 초상집에서 혼자 들떠서 자기 자랑하는 재미에 희희낙락하는 부류가 있으니,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운데 특히나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 바로 ‘경찰’이다.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 강모씨를 잡으면서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CSI식의 최첨단 기법을 사용했다는 자화자찬을 마주하면 왠지 모를 거북함이 밀려온다. 뭐 용산 학살에서도 이미 경험해서 대한민국 경찰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 가질 법한 애도나 예의 같은 것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초상났는데 지 자랑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눈치 없을지는 정말 몰랐다. 물론 범인 강씨가 저지른 죄는 인간으로 할 짓(상상하기도 싫고 무서워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을 정로도)이 아니고, 그를 검거한 것 자체는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피해자 앞에서 범인 잡은 공을 스스로 치하하는 건 도대체 뭐란 말이냐.

이런 몰상식한 경찰의 행동은 그들의 인격(경찰관 개개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이 가지는 어떤 품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경찰의 설레발에서는 뭔가 다른 냄새가 풍긴다. 첫 번째로 경찰이 가지고 있는 치안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의 문제이다. 아무래도 경찰은 ‘치안’을 단순히 범인 잘 잡는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치안의 본래 뜻은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림. 또는 그런 상태. 혹은 국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보전함’이다. 즉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당연히 잡혀야겠지만, 범인이 많이 잡힌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 사회에 범죄가 많다는 이야기이고, 그런 사회에서 맘 편히 살기란 쉽지 않다. 경찰의 역할은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범죄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노자 17장을 비유하자면 “가장 좋은 경찰은 시민들이 경찰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경찰이다.”

물론 범죄라는 것이 단순한 형사사건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중첩되어 일어나기 때문에 범죄의 발생을 무조건 경찰의 책임만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연한 일에 대한 과분한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 경찰을 보고 있자면, 과연 경찰이 원하는 게 범인 많이 잡아서 실적을 높이는 것인지, 잡아야 할 범인이 없을 정도로 치안이 안정된 사회를 원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28일자 중앙일보 12면.
두 번째는 과학수사라는 언어에 포함된 고약한 냄새다. CCTV를 이용한 CSI식의 과학적인 수사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하였고, 여죄를 밝히기 위해 프로파일링 기법을 도입한다는, 마치 무슨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동안 가학수사를 전문으로 해온 과거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좋다. 아무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통령의 시대라고 해도 범죄 수사에서 구둣발로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과학수사 좋다. 근데 한국경찰이 과학수사 이야기하면 왠지 <살인의 추억>에서의 송강호가 과학수사 이야기하는 것 같은 좀 생뚱맞은 느낌이 든다. 경찰조사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안다. 한국경찰이 이해하고 있는 과학수사라는 것이 조서 쓸 때, 연필 대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정도라는 것을. CCTV 300여대에 찍힌 차량 7천여대를 선정해 분석했다는 것은 경찰의 ‘우직함’에 대한 상징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과학수사로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저수지 물고기를 잡던 것을 전기펌프를 돌려 잡았다고 해서 과학적 어로행위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적 사고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다. 한국 경찰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문학적인(감수성은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사고에 기반한 수사를 한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연행된 많은 사람들이 일단 연행하고 나면 어떻게든 죄를 씌우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경찰조사에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한국경찰은 과학수사 운운하려면 CCTV니 뭐니 하는 기계(흔히 고등학교 문과보다 이과에서 더 많이 배우게 되는)를 사용해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번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범인의 여죄는 무엇이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리적고 합리적인 접근법을 보여줘야 한다. 더군다나 CCTV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과학수사(!) 기구들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의 침해 등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고, 이는 범죄 예방보다는 검거를 위한 수단이지 않은가. 경찰의 과학수사 운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비과학적인(비논리적인) 경찰의 수사방식을 기계의 힘을 빌어서 눈가리고 아웅해보자는 속셈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을 막아야할 곳에는 있지 않고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는 곳에만 존재하는 한국의 경찰. 치안의 확보보다는 범인 검거에만 힘쓰는 경찰.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소잃고나서 외양간 고치면서 새로운 장비 사용했다고 거들먹거리는 경찰. 정태춘의 노래 <아, 대한민국>의 한 구절이 슬프게 떠오른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잔인하게 유린 당하는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