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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절망과 슬픔을 따뜻한 감정으로 바꿔주는 이름, 가족[블로그와] 탁발의 티비 읽기
탁발 | 승인 2016.04.23 11:26

드라마 <기억>은 교통사고 뺑소니로 죽은 아들의 범인을 쫓는 일종의 스릴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그런 이야기보다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성민과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에 더 관심이 간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이성민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조마조마해서 가슴이 아플 지경인데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는 그 아픔을 따뜻한 감정으로 바꿔버린다.

처음에는 아내 김지수였다. 님이라는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부부란 한 인간이 갖는 가장 깊고 긴 관계이면서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이 불안정한 관계이기도 하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 유리 같은 관계를 깨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다 늙어서 치매가 와도 그 가족 전부가 겪어야 할 불안과 고통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인데 애들도 아직 어린 때에 알츠하이머라니. 어쩌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남자를 버리는 편이 현실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현실에서는 충분히 많이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사업만 망해도 이혼하는 판에 수십 년 고생길이 열릴 알츠하이머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내는 오히려 남편의 병을 미리 알지 못하고, 남편이 헤어진 전처의 집에 들락거리는 것을 오해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남편의 그 고독에 따뜻한 손을 얹어주었다. 리얼리티는 이럴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럴 때는 세상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더 따뜻해서 좋았다.

그렇게 박태석은 아내라는 산을 넘었다. 같은 가족이라도 부부관계와 자식과의 관계는 또 다르다. 아들 정우는 얼마 전부터 아빠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예민한 나이에 모를 리가 없다. 어리지만 왠지 그것을 아빠에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도 무섭고 당황스럽지만 아빠에게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안쓰럽고 대견했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그런데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아이스크림을 사러간 아빠가 통 오질 않았다. 엄마가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아들은 먼저 달려가 버렸다. 한참을 달려가자 아들의 눈에 아빠가 보였다. 두 손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쥔 채 얼어붙은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빠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잠깐 사이지만 고민스럽기만 하다.

그런 아들의 복잡한 감정을 구해준 것은 아빠 박태석이었다. 아빠는 정우를 보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반가워했다. 아빠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들 정우는 대신 아빠보다 앞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 뒤를 박태석은 말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슬퍼서 가슴이 아릴 지경이었다.

그냥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픔이 커질수록 왠지 더 따뜻해지는 심정인 것이 이상했다. 하필이면 가족들과 전에 해보지 못한 벚꽃구경을 가서 벌어진 이 난감한 해프닝 속에 어린 아들 정우는 가슴을 정말 뜨겁게 만드는 직격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는 아들과 함께 조깅을 나갔고, 벤치에 잠시 쉬는 동안 결국 아들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한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지난밤 보인 아들은 어린 나이답게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말해줘도 될 것 같았다. 아니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꾸 숨기다가 결국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영영 기억을 잃어버리면 아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린 아들에게 자기 불치병을 고백하는 아빠의 심정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점점 기억으로부터 유리되는 박태석은 갈수록 절망적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절망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박태석이 겪는 모든 절망과 슬픔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따뜻한 위로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울다가 웃다가 하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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