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도 한때는 명절TV의 신도였다. 추석과 설이 되면 살뜰하게 신문에서 TV편성표를 오려내 놓치지 말아야 할 프로에 빨간색 체크까지 하는 열성신도였다. 명절TV가 내 기대를 온전히 채워준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세월이 지난 탓이겠지만, 한 상 가득 부려놓은 명절음식이 먹기도 전에 헛배가 불렀던 것처럼 TV프로를 보기도 전에 편성표의 풍만함에 미리 취해버렸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실제로는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노골노골함과 더불어, 이 시간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자각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콘텐츠에 대한 아쉬움과 뒤범벅이 된 복잡미묘한 초조함에 손톱이나 물어뜯고 있었을 게다. 이제, 명절TV는 고사하고 방바닥에 배 깔고 드러누워 나른한 포만감을 만끽하며 TV를 섭취하던 시절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경험이 되어 버렸지만.

일단 켜놓으면 무한채널 서핑과 함께 두세 시간 멍 때리기는 기본옵션으로 깔아주는 몹쓸 습관이 지긋지긋해 유선을 끊고 TV를 치운지 6개월쯤 됐다. ‘TV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화들짝 놀라는 지인들이 여전히 있지만, 가끔 동료들과 개그콘서트 코드의 싱크로율이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불편은 느껴본 적 없다. 나는 안상태 기자의 ‘~할 뿐이고’라는 표현의 오리지널을 아직껏 본 적이 없다. 가끔 나도 그 표현을 쓰긴 하지만 왠지 신이 안 날 뿐이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자. 명절이 즐겁나? 명절을 건강하고 유쾌하게 보내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미션임파서블’에 가깝다. 농경사회의 전통을 후기산업사회에 그대로 유지하려는 이해 못 할 관성이 가져오는 폐해는, 다시 강조하는 것이 계면쩍을 만큼 상당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그런 까닭에 명절엔 대개 EMP쇼크웨이브를 먹은 드라군처럼 약간은 얼이 나간 상태로 보내기 마련. 명절이 주는 스트레스를 면제받는 것은 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있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어르신들이나, 어르신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신출내기 꼬마들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명절이라는 개미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이들이 많아지고는 있지만 불행하게도 대다수는 지옥의 한가운데서 버둥거리는 중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TV 앞에서 하릴없이 죽 때리는 것 말고 특별한 게 있냐고? 뭐, 나도 몇 년 전까지 그렇게 기나긴 명절휴일을 보낸 입장에서 보자면 틀린 말 아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애꿎은 시간만 죽이면 뭐 남는 거라도 있나?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 성룡을 앞세운 그 나물에 그 밥 명절특선 영화 릴레이, 청와대나 백악관을 폭파시킨다면 모를까 어떤 기술도 놀랍지 않은 닳고 닳은 마술쇼, 최상의 귀여움을 구토를 유발하는 지겨움으로 승화시킨 동물쇼, 인기절정의 스타들을 총집합시켜놓고 한다는 게 트로트 경연, 여기에 외국인들을 끌어다 한복 입혀놓고 한국의 예절입네 하는 속 빤한 쇼까지. 노루 때린 몽둥이 삼년 우린다지만, 이거 한 이십년쯤은 우려먹은 소재들이다.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씩이나 하고, 감동을 줘야 하면서, 전통을 강조하고, 우리나라를 보여줘야 하는… 명절은 없고, 명절을 표상하는 덜 익은 욕망들만 들끓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환멸로.

그러는 나는 명절에 뭐 했냐고? 뭐라고 할 만한 게 있나. 명절에 특별한 의미를 덧씌우는 건 1999년 9월 9일 9시 9분 9초가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특별한 순간이라고 여기는 정신 상태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게 내 평소 생각이다. 명절은 그저 공식적인 연휴일 뿐이다. 민속학적으로 혹은 문화인류학적으로는 더욱 거창한 의미들이 붙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강요된 며칠간의 일정을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그렇다. 쉽게 피할 수도 없지만 애써 피하려 하지도 않는 매해의 통과의례들을 제쳐놓으면 말이다.

명절에 뭐했냐고?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일을 했다.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고, 외가에 가고, 처갓집엘 가고, 어른들과 아이들이 마주본 상태에서 쪼르르 엎어져 지폐 몇 장을 교환하고, 뱃가죽이 찢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쇄도하는 먹거리들을 방어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친지들의 정치한담에 행여나 희생물이 될까 조바심을 쳤더니 어느 새 오늘이 됐다. 물론, 고향에 내려가기 전 하루는 평소 휴일과 마찬가지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데 온전히 바쳐졌다.

중간 중간 비는 시간에 음악이나 조금 들어준 게 약간 다를까. 피곤에 지친 기나긴 밤을 책 몇 권과 함께 했다는 게 다를까. 무차별적으로 살포해대는 TV전파를 피해 그나마 선택 가능한 ‘미드’들과 함께 한 것이 색다를 이유가 있을까.(출판 일을 하는 선배 하나는 미드를 실시간으로 보는 일이야말로 21세기가 주는 몇 안 되는 혜택 중 하나라고 하던데, 십분 동의한다.) TV없어도 명절은 명절이고, 인생은 잘만 굴러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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