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ppery Rock이라는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 와있습니다. 새해 첫날, 바깥에 나가 먼 지평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쳐다봅니다. 눈이 발에 밟힙니다. 햇빛에 영롱하게 반짝이네요. 잠시 삶을 반추해 봅니다. 루카치를 읽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일까요? 2009년 우리가 현실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기 지식’은 뭘까요? 며칠 전 유학생활을 했던 위스콘신주의 매디슨을 찾아갔습니다. 학교 가는 버스 앞자리에 한 흑인 할머니가 앉아 계시네요. 아네트 힐이라는 66세 노인입니다. 어디선가 주어온 신문 쪼가리들을 칼라펜으로 그으며 읽고 있습니다. 대체 무얼 그리 열심히 보나 궁금해 말 걸어봅니다. 다음과 같은 칼럼의 한 대목을 열심히 기억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냥 영어로 옮겨봅니다.

“John Kennedy led us on a journey to discover the moon. Obama needs to lead us on a journey to rediscover, rebuild, and reinvent our own backyard.”

당연히 ‘우리’로 호명되지 않지만, 괜히 뭉클하더군요. 어찌 처참히 뭉게진 데가 미국 동네 뒷마당뿐이겠습니까? 미국 경제가, 미국 노동자의 삶 자체가 망가진 것 아닌가요? 오만한 제국에 의해 세계평화, 전지구적 삶이 파국을 체험하지 않았나요? 그 극악한 일방주의, 흉폭한 국가테러 때문에 한국에 있는 우리도 얼마나 많이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공포라기보다는 차라리 혐오라 표현하는 게 맞겠지요. 그래서인지 오바마가 당선되었을 때는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묘한 기대감도 생기고요. 그러니 이 흑인 할머니를 비롯해 미국의 일반 대중, 특히 벌거벗은 삶의 청년들이 느낀 감동이야 어떠했겠습니까? 20일 후면 취임할 오바마를 새로운 삶의 구세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비극적 아이러니가 커졌습니다. 할머니의 순진한 발상에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촘스키가 말하는 권력이, 보다 정확히 말해 자본권력이 오바마를 가만히 내버려둘까요? 신자유주의란 게 정부나 국가가 아닌, 바로 자본이 모든 걸 결정하는 체제 아닌가요? 오바마를 고립, 순치시키기 위한 권력의 훈육프로그램이 발동했다고 봐야 합니다. ‘변화’의 영웅적 메신저를 전형적 민주당 정치가로 포섭하는 주류게임입니다. 벌써 그를 ‘보호무역주의자’로 낙인찍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시티뱅크를 비롯한 초국적 자본이 한국의 재벌/전경련과 연합해, 이명박 정권을 통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급하게 추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신보수/신자유주의 봉쇄전략의 문맥에서 찾아봐야 하겠지요.

물론 너무 비관적인 것도 금물입니다.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적 비참의 증거로 지목한 관타나모 캠프에 당장 폐쇄령을 내린 게 오바마입니다. 그의 선택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외교적 지략, 상징적 수사에 불과할까요? 지나치게 들뜨면 안 되지만, 희망을 포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만 있는 게 아니고, 대중역능이라는 것도 실재합니다. 바로 이 역능의 정치학이 권력의 통치학에 결정적 구멍을 냅니다. 앙시엥 레짐을 구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역사를 연출합니다. 오바마가 당선된 날 그 많은 미국인들이 눈물 흘렸던 것도, 억압의 체제에 맞서 변화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바로 자신에 대한 위무의 표식, 자기 역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 3일 국회 앞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로 '언론' 글자를 만들었다. ⓒ송선영
권력이 불가능성이라는 패배의식에 기생한다면, 역능은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사유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권력과 역능의 쟁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수구의 실재성과 변혁의 잠재성 사이의 다툼에 다름아닙니다. 권력의 승리로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기민하게, 그리고 게바라가 말하는 전략적 마인드로 움직이면 승산이 있습니다. 대중의 상식, 양심과 통하면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무지막지한 파시즘적 ‘애국자법’을 고안해 낸 부시입니다. 대중교통에 대한 폭력, 자유언론의 통제가 법과 명령의 이름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시민과 언론인, 학자들이 겪은 21세기 초엽 야만의 기록은 듣기에도 섬뜩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선전의 벽을 뚫고 대화의 힘은 대단한 현실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보면, 앞서 소개한 할머니가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일상 속 그녀의 소박한 의식적 활동, 한국에서 온 저와의 겸손한 대화적 실천, 바로 이런 게 모두 희망의 씨앗 아닐까요? 이런 교제의 촘촘한 망을 통해 희망의 네트워크가 결성되고, 그래서 영원히 갈 것 같던 국가권력의 폭력을 구축하고 자본권력의 선전을 차단하는 것 아닐까요? 사회를 보호해 내는 것 아닐까요? 위기의 체제로부터 위험한 삶, 벌거벗은 삶, 즉 호모사케르의 삶을 자기 구제코자 하는 의지의 결행입니다. 아감벤이 말하는 ‘다가올 공동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 당장 이곳에서 정치를 실천하고 그래서 치안상태에 저항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겠지요. 맞습니다. 문제는 치안에 맞서는 정치입니다.

▲ 지난 30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 저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언론노조 총파업 2차대회’에 약 4천명의 언론인들이 참가했다. ⓒ미디어스
2009년 한국사회는 큰 위험을 겪을 것 같습니다. 그 위기는 경제적인 것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입니다. 자본의 축적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치안스테이트 강화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험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위험사회’가 아닌, 사회의 위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 위험의 강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이전 한국사회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총체적 통제, 전체적 감시의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엄청난 양의 법안들을 보면 압니다. 9·11 이후 부시가 도덕적 공황에 기초해 애국자법과 같은 공포의 법안들을 밀어붙이던 방식과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래서 희망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변화에 대한 인민의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폭압과 선전의 불리한 조건에서 발아합니다. 보편적 폭력에 노출된 삶들과의 동정, 연민이 가는 타자들과의 진솔한 교제를 통해 무수한 가지들로 확산됩니다. 그렇게 잠재되어 있다가 불끈 튼실한 에너르기 줄기로, 꺾이지 않는 힘찬 활력의 기둥으로 융기합니다. 지난 촛불이 그랬습니다. 앞으로도 당연히 가능한 것 아닐까요? 저는 파업 중인 한국의 언론 노동자들에게서 또 다른 역능의 결집된 운동학을 발견합니다. 2009년 한 해를 절망이 아닌 희망의 화두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변화의 메신저와 만나게 됩니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그 민주적 행동의 시작으로서 여러분은 새해 첫날부터 우리에게 큰 희망입니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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