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만났다. A는 대입을 앞둔 딸이 있다. 수시에 떨어지고 두 군데 정시 모집 원서를 접수한 후 합격 여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평소 성실하고 자기 앞가림 잘하기로 소문난 A의 딸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아이다. 딸 키운 보람 톡톡히 볼 거라며 모두 A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만 둘인 나는 애초부터 딸의 다감하고 자상한 면모를 느끼지 못한 터이고 또 다른 친구인 B는 학교성적으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딸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다. 내 친구 둘 다, 새해부터는 두 집 살림을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A는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규모를 줄여 딸의 원룸 전세비라도 마련해야 하고, B 역시 딸이 전주권에 있는 학교에 진입하지 못하면 인근 중소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하기 때문에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한 터이다.

나 역시 3대가 거주하다보니 넓은 공간이 소원이다. 방 하나를 넘게 차지하는 책과 각종 자료 때문에 거실 안방 할 것 없이 공간만 생기면 처박고 탑을 쌓아놓는 중이다. 거기다 어머니 탓 좀 붙이자면 어디서 온갖 살림살이를 다 들여오시는지 부엌이며 베란다에 널어놓은 살림이 말이 아니다. 발 디딜 틈도 없다고 불평하면 “야야~ 사람 사는 집에 이것 저것 다 필요한 것이다”며 완강하게 버티신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틈을 타 한 번씩 집 정리를 하고 나면 보기에는 깨끗한 듯 해도 어머니는 “내가 늙으니까 느그들이 나를 괄시하는구나”하시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친구들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이 다 그렇다”면서 쾌적한 공간을 포기하라 한다. 대신 어머니가 해주는 게 얼마나 많으냐고 위로하면서….

문제는 돈이다. 서울에 원룸 하나 얻을 돈이 없고, 지방에 자취집 하나 구할 돈이 없고, 방 한칸 넓혀갈 돈이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사는 게 왜 이 모양이냐’며 한탄을 하다가 급기야 헤어지는 길에 로또를 샀다. 더 이상 이 땅에서 믿을 만한 것은 로또밖에 없을 것 같아 “로또만이 희망이다”라고 외치며 각기 한 장씩 뽑아들었다. 다른 모임에서 1차, 2차 돌아가며 쏜다해도 ‘로또’만은 어쩐지 제 돈 주고 사야할 것 같아서, 다들 자기 주머니 털어 로또를 샀다. 그러면서 셋다 주인을 보고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물었다. 모두들 로또 구입이 처음이었다.

▲ 2007년 12월 1일자 조선일보 B3면 이미지.

일전 서울에 사는 가까운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한숨만 푹푹 내 쉬더니 남편이 엔화 대출을 받은 것이 이자가 원금의 두 배가 되었다며 속상해 했다. 의사인 그녀의 남편은 서울 강남에서 친구 몇 명과 병원을 개업했다. 걱정없이 잘 나가는 사모님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남편이 지난 여름 의료기 구입이며 리모델링 비용으로 엔화 대출을 받았다가 몇 달 새 이렇게 되었다며 허탈해 했다. 친구가 말한다.

“나는 병원 늘릴 때도 말렸거든. 그냥 부족한 대로 욕심없이 살면 되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이야. 그 일 때문에도 많이 다투었거든. 하지만 애 아빠도 답답하겠지? 다른 와이프들은 재테크도 잘 한다던데 난 전혀 그런 능력도 없고….”

무늬만 의사 부인이지 평소 명품 타령 한번 안하고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그녀가 재테크니 뭐니 하는 것은 당최 그녀 사전에 없는 말이다. 이제 와서 엔화 대출 받아 병원 리모델링 한 남편의 투자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동산이라도 굴려 남편을 내조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책이 마음 아프다. 그녀에게 ‘로또라도 사지 그러니?’라고 말했다가 괜시리 미안해졌다. 그런다고 해서 로또를 살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실 요행을 바라고 살아온 게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믿었다. 종교의 가르침 또한 선한 삶을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어쩐지 능멸당하는 것 같아서 ‘한탕주의’에 슬그머니 발을 디밀어 본다. ‘뭐, 재미로 로또 하나 산 것이 어때서?’라고 하기엔 그동안 믿어온 신념이나 믿음 같은 것을 배신해야 하는 정체성 혼란이랄까 복잡미묘한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이수일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냐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심순애의 심정이랄까.

‘어디 어디에 좋은 목이 나왔으니 그거 잡아두면 나중에 크게 한 건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해도 그건 그림의 떡이다. 우선 내가 아는데 남이라고 모를까 싶고 무엇보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아득한 사람들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 건을 위한 투자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재테크의 기회는 많았겠지만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혹은 행하지 못한’ 사례가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로또를 사놓고 추첨일 이삼일 후에 확인해보니 ‘인생역전’은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친구들 또한 잠잠한 걸 보니 그녀들의 ‘대박’의 꿈도 사라진 듯 하다. 별 수 없이 들어놓은 적금 있으면 헐고 30평형 아파트 줄여서 교육비로 보태야 할 것이다. 친구들 사정이니 알아서들 하겠지만 그것이 결코 남의 일도 아니다. 몇 년 후 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 김사은 PD가 진행하는 전북원음방송 '아침의 향기' 홈페이지 캡쳐
내가 진행하는 <아침의 향기 - 전북>이라는 로컬 프로그램에서 <향기 골든벨>이라는 코너가 있다. 퀴즈 코너인데 정답을 맞추는 청취자와 인터뷰를 한다. 개편 때마다 문자 참여로 바꿀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유일하게 청취자와 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남겨두고 있다.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도 주고 받고 사는 이야기도 하다가 희망의 메시지로 마감을 한다. 청취자들의 꿈은 한결같이 소박하다.

“뭐~ 바라는 건 없고요, 그냥 가족들 건강했으면 좋겠고, 경제가 잘 풀렸으면 좋겠고,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어쩜 한결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마무리한다. 농담이라도 ‘로또에 당첨됐으면 좋겠어요’는 단 한 명도 없이 ‘그냥… 바라는 것 없이 가족들 건강하고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부, 카센터 주인, 서점 주인, 사무직 여성, 주유소 사장, 우유 배달원, 휴대전화 대리점 주인, 택시 운전사, 버스 기사, 유치원 교사, 토마토 농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조선소 기술자, 새만금 공사현장의 근로자, 자동차 부품산업체 근로자, 사무직 직원 등등 하는 일은 달라도 바람은 한결같다. 누구를 탓하거나 날 선 원망은 없고 오로지 ‘그냥…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일 따름이다. 나 또한 새해를 맞아 바라는 소원이 뭔가 생각해봤더니 의외로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그냥… 가족들 건강하고 큰아이 고등학교 수월하게 가주는 것’이 올해의 소원이다. 새해를 맞아 청취자들과의 전화 연결은 계속될 것이다. 올해 어떤 소망을 갖고 있는지 물어볼 것이고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냥…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요, 경제가 잘 풀렸으면 좋겠고요, 어렵다 어렵다 해도 희망이 있으니께 힘내세요.”

누가 우리의 소박함을 능멸하는가?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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