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첫 아침, 전날 밤의 패배를 이성적으로 환원해야만 했다. 목구멍으로 침 넘기기가 어려웠다. 참 많이도 울어댔다는 짜증스러움과 어찌되었건 이제 더 이상 여의도의 지긋지긋한 칼바람을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침방울 대신 멍하게 넘겼다. 그렇게 삶은 계속됐다. 2004년 12월 31일 밤이 아닌 포근했던 2005년 1월 1일 아침 침대의 기억으로.

2004년 12월 31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포함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이 최종적으로 좌절되었다. 당시 국회는 내년 2월에 반드시 처리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진 않았다. 괴로웠던 건 그 상황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뱉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컴퓨터를 뒤져보니 12월 31일 이후, 그 상황에 대해 처음 글을 썼던 건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단 한 문장이었다.

“공허하고 혼미하여 주워 담아지지 않는 질서정연한 상처들”

당시 나는 사회단체 활동을 막 시작한 초짜 중의 초짜였고, 학생운동의 경험도 없었던 까닭에 농성과 단식은 물론 민중가요조차 제대로 웅얼거리지 못하던 얼치기 활동가였다. 그리고 1000명이 넘는 단식자들이 함께한 아스팔트의 말석에서 실무를 맡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의 패배는 스스로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게 했다. 연대와 적대는 모호했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인 것의 차이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2004년 12월 31일에서 2005년 1월 1일로 넘어오는 시간에서 참 오래 살았지 싶다. 그 시간을 뉘엿뉘엿 빠져나오고 나서야 겨우, 오늘의 시간에서 빠져나가 내일의 시간을 꿈꾸는 일이란 미리 당겨썼던 어제의 시간을 갚을 때에만 가능함을 굳게 믿게 됐다.

그리고 오늘, 2004년 12월 31일 이후 가끔 꾸는 악몽을 오랜만에 꾸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체험할 방도가 없는 일이지만, 나는 가끔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소의 속도와 마주하는 그런 종류의 악몽을 꾼다.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두 다리는 논두렁에 발목까지 잠겨 얼어붙어 있다.

초읽기의 시간이 지루하게 펼쳐지고 있다. 결의를 다지는 민주당, 계가에 들어간 한나라당, 초조한 조중동 그리고 투쟁하는 언론인들까지. 공수는 뒤집어졌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인 것들의 위치는 정확히 반대가 되었다. 유일한 닮음은 제가끔의 시계바늘이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2009년의 첫 아침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새벽녘까지, 뭔지 모를 것들이 범벅된 불안함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촛불 때도 그렇더니, 끝까지 노동으로 복된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 엄마는 아침 인사 대신 멀고 살기도 어려운데 폭력과 극한으로 저러고 있는 연말 국회 정말 짜증스럽다는 푸념을 던졌다. 유종일 교수가 진행하는 아침 경제 라디오에선 여전히 62%의 국민들이 행복하다는 리서치가 발표됐다. 물론, 2006년에 비해서는 10%가 하락한 결과라고 한다.

▲ 동아일보 12월31일치 1면 사진.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젯밤 꿈자리의 데자뷰처럼, 동아일보는 전국 소싸움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는 '대한'이리는 황소가 바닷가를 달리는 사진을 1면 탑으로 실었다. 참으로 극악스러운 이들이다.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일까, 쉼없이 공허하고 끝없이 혼미해져 온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도저히 주워 담아지지 않을 것 같은 질서정연한 상처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투닥투닥 키보드를 두드리던 사이 2008년이 채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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