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향후 수십 년을 좌우할 수 있는 ‘역사적 국면’(historical conjuncture)을 현명하게 경륜하는 정치인(statesman)으로서의 자질이 김형오 의장에게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게 솔직한 이유였다.

▲ 김형오 국회의장 ⓒ여의도통신
그래도 기대한 게 한 가지는 있었다. 지금 국회의장이 해야 할 일은, 똑같은 가중치를 두어 여-야 양쪽을 모두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가중치를 달리해 잘잘못을 가려줘야 한다는 것, 누가 지금의 상황으로 몰고 왔는지에 대해 무게를 달리해 평가해줘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김 의장의 말처럼,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정국을 누가 창출하고, 무엇 때문에 창출됐는지에 대한 평가는 정국 타개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 의장의 성명은 장황한 현상의 나열에 그쳤다. 거대 여당의 횡포가 지금의 상황을 낳은 주범임을 내비치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국민들이 도대체 왜 싸우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다”며 심각한 현상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국민의 63%가 재벌과 거대신문이 방송 미디어를 소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있음에 애써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제가 두려워할 대상은 여도 야도 아닌 국민”이라는 김 의장의 발언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오히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회 안에서 벌어지는 “반의회적, 반민주적 구태와 관행”이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에게 오늘 밤 12시까지 본회의장 농성을 풀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질서 유지권을 행사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12월31일 본회의를 열어 여야가 합의하는 민생법안 처리를 하라는 요구도 있지만, 이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여야가 합의하는 ’민생법안‘이라는 게 물리적으로 12월31일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12월28일 온갖 꼼수와 왜곡을 부려가며 재벌과 거대신문에 방송 미디어를 가져다 바치는 신문법과 방송법 개악안을 ‘경제를 살리는 민생법안’에서 ‘위헌․일몰 관련 법안’으로 바꿔치기해 놨다. 정말 ‘후안무치’하다. 합헌 결정 받은 신문법과 방송법 관련 내용을 위헌으로 분류하다니, 파렴치 파렴치 저런 파렴치가 없다. ‘경제 살리는 민생법안’은 선비준의 실효성과 타당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한미FTA 비준안, 은행까지 재벌이 완벽하게 지배하게 만드는 은행법 지주회사법 개악안 등 극심한 진통을 겪는 사안들이 고스란히 다 포함돼 있다.

그뿐이 아니다.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핸드폰 도청과 감청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고, 국가정보원의 정치사찰이 완벽하게 부활시키는 법안을 사회개혁법안으로 분류해 놨다. 국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불안에 떨게 만들면서 이걸 ‘사회개혁’이라고 언어도단 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김 의장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안들에 대한 언급은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합의하는 민생법안’을 연내 처리하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 29일 자정까지 본회의장 농성을 풀라는 말만 있다. 농성을 푸는 그 순간,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본회의장 주변을 철통같이 겹겹이 둘러치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의원들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할 게 뻔하다는 걸 김 의장은 모른 척한다.

단언한다. 김 의장의 성명에서 도출되는 시나리오는 날치기가 31일로 미뤄진다는 것뿐이다. 질서 유지권을 발동하기 위한 ‘알리바이 쌓기’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민주당은 29일 자정까지 본회의장을 비우라는 김 의장의 성명에 단호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안은, 한미FTA 체결의 장본인이던 민주당이 왜 해머를 들면서까지 한미FTA 비준을 결단코 반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본회의장에서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정당이 자신의 중대한 정책 변화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건 의무다. 은근슬쩍 어물쩍 넘어가려는 작태를 버리라는 말이다. 그걸 버리지 않는 한, ‘한미FTA 체결세력이 비준 반대한다고 해머 들고 설친다’는 족벌 수구세력의 비아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12월29일 하루종일 민주당이 할 일은 두 가지가 있다. 한편으론 7대 언론악법을 포함한 반민주악법, 경제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금산분리 완화, 사회불안법을 제외한 민생법안의 시급한 처리를 위해 한나라당과 최선을 다해 협의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한미FTA에 대한 입장 변화를 당론으로 정리해 대국민 설명회를 준비하는 것이다.

본회의장 사수는 기본이다. 그에 따르는 비난은 얼마든지 감수하길 바란다. 비난하지 않는 이들이 훨씬 더 많고, 그들이 오히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실로 걱정하는 세력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막겠다’는 초심을 버려선 안 된다. 김 의장의 성명은 그걸 재확인해 준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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