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도 사골 곰국처럼 우려먹던 할리우드인지라 이번에는 이집트 신화로 관객을 유혹할 채비를 갖췄다. 이집트 신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누가 악당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형 오시리스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는 설정은 영화 속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 이집트 신화 그대로다. 단, 미성년자 관객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신화의 잔혹한 설정, 형의 죽은 육신을 갈가리 찢어 이집트 전역에 흩뿌린다는 세트의 만행은 영화에서 탈색한다.

▲영화 <갓 오브 이집트> 스틸 이미지

형의 왕좌를 부당하게 차지하고 조카 호루스를 장님으로 만든 세트에게 남은 건 복수의 칼날을 가는, 두 눈을 빼앗긴 조카 호루스. 한데 세트를 향한 복수극은 신인 호루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인간이 호루스의 복수극에 중요한 조력자가 된다. 신의 활동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물론 이집트 신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각색이자, 철학적으로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읽어볼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 혹은 신학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신이 하고자 하는 섭리나 행위가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인간이, 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계획에 따라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계획에 동참하기 마련이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신의 명령을 거스르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다가 큰 물고기의 밥이 되는 신세를 겪고 나서야 신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이야기만 보아도,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신의 이지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영화 <갓 오브 이집트> 스틸 이미지

하지만 <갓 오브 이집트> 또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이 어떤 하나의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하더라도 인간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력하느냐에 따라 신의 계획이 영향을 받는다. 기존의 신학 또는 철학에서 인간의 의지보다 앞선 것이 신의 의지라면, 과정철학에서는 아무리 신의 의지가 크다고 해도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적극적이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이야기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은 삼촌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는 호루스의 의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앞을 보지 못하는 호루스에게 복수의 의지는 무용지물이다. 눈이 보여야 아버지 오시리스를 살해한 패륜 삼촌인 세트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영화 <갓 오브 이집트> 스틸 이미지

이때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 호루스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벡이 호루스의 한쪽 눈을 되찾아 주지 못했다면, 호루스는 아무리 신이라 한들 삼촌에 대한 복수는커녕 맹인으로 영영 살았을 것이다. 복수를 하고자 한들 인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신의 복수 의지가 무력화되거나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관점은, 영화적인 설정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빚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인간이 신의 체스말이 되는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신이 함께 체스에서 말을 두는 판세를 오락영화인 <갓 오브 이집트>에서 찾을 수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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