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십여 년 동안 북유럽 호러 영화 가운데 걸작을 손꼽으라고 할 때 <렛미인>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것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스웨덴에서 창출된 영화 <렛미인>이 스코틀랜드에서 연극으로 꾸며졌으니 ‘원 소스 멀티 유즈’이기는 해도 국적은 다국적으로 다양화되었는데 이런 <렛미인>이 한국에 와서 날개를 달았다.

충무로의 미친 연기력으로 각광받는 신예 박소담이 흡혈귀 일라이 역으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검은 사제들> 오디션 당시 2,000:1의 경쟁률이었다는데 <렛미인>도 만만치 않아서 600: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하니, 박소담은 가히 ‘경쟁률 지옥’인 작품에만 출연하는 괴물 신인인 셈이다.

<렛미인>은 연극 버전 <고스트>일지도 모른다. 뮤지컬 <고스트>는 현란한 시각적인 효과로 관객을 사로잡은 작품, 이에 뒤질세라 <렛미인> 역시 무대를 보면서도 믿지 못할 특수효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고 있다. <렛미인>의 무대는 단출하다. 오페라 <세미라미데>나 뮤지컬 <인더하이츠> 무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무대로 가지만 특수효과는 무대의 단조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 연극 <렛미인> Ⓒ신시컴퍼니

일라이가 오스카에게 허락 받지 않은 상태로 방에 들어왔을 때 피를 줄줄 흘리는 장면을 영화 팬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극 또한 2막에서 일라이가 남자친구에게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단으로 방에 들어올 때 일라이를 연기하는 박소담의 얼굴은 갑자기 피범벅이 되고 만다. 영화 <캐리>처럼 공중에서 피를 투하하는 것이 아님에도, 영화 속 특수효과처럼 정수리부터 내려오는 피로 얼굴을 도배한 박소담의 얼굴을 보면 무대를 보고 있으면서도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건 특수효과가 다가 아니다. 1막에서 일라이가 오스카를 처음 만나고 나서 헤어지는 방식이 독특하다. 박소담은 2미터 높이의 무대에서 이집트 미라처럼 양 손을 가슴에 댄 채 등을 뒤로 하고 낙하한다. 관객은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일라이가 보통의 인간 소녀가 아니라는 설정을 극대화해서 처리하는 연출이다.

<렛미인>은 슬픈 공포다. <렛미인>의 히로인인 일라이와 닮은 영화 속 캐릭터를 꼽는다면 <하이랜더>의 주인공 하이랜더일 것이다. 둘 다 늙지도 시들지도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라이 혹은 하이랜더의 인간 배우자는 세월이 지나면 병이 들어 죽거나 노환으로 수명을 다하는 한계를 갖는다. 일라이가 수백 년을 사는 동안 만나는 남자친구나 남편은 세월이 지나면 저세상으로 떠나고야 만다.

▲ 연극 <렛미인> Ⓒ신시컴퍼니

일라이에게 피를 공급하는 하칸(주진모 분) 외에도 다른 남자인 오스카에게 눈을 돌리는 건 일라이가 하칸에게 질려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가 수명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기에 하칸의 바통터치를 이을 남자를 물색하던 가운데 오스카가 눈에 들어온 결과로 볼 수 있다. <렛미인>이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혹은 슬픈 정서를 띄는 것도 히로인은 죽지 않지만 남자친구가 수명이 다하면 다른 남자로 바꿔야 하는 뱀파이어의 태생적인 숙명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올 겨울 연출적 혹은 무대적으로 뛰어난 연극 작품을 추천한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과 <렛미인>을 손꼽을 것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외국 공연을 들여오되 ‘레플리카’ 방식으로 들여와 미국 또는 스코틀랜드 버전 그대로 한국 관객에게 소개되는 연극이다.

창작물보다 레플리카 방식의 외국 연극이 잘 빠진 연극으로 꼽힌다는 건 그만큼 창작품의 경쟁력이 해외 작품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영화계는 <쉬리> 이후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에 뒤지지 않건만, 연극과 뮤지컬계는 잘 만든 라이선스물의 공세에 창작물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세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연극 <렛미인>은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