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7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몽키하우스’에 관련된 비밀은 수많은 시청자들을 충격과 혼란 속에 빠뜨렸다. 지상파 방송에서 미군 위안부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그것이 알고 싶다>가 최초였기 때문에, 방송 이후의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몽키하우스’로 세상이 들썩인 것도 잠시, <그것을 알고 싶다>를 계기로 수면 위에 올라오는가 싶었던 미군 위안부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최근 이 ‘몽키하우스’, 점점 사라져가는 기지촌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봉됐다.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진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거미의 땅>이다. 이 영화에는 한 때 기지촌에서 미군 위안부 생활을 하였던 두 명의 여성과 한국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혼혈 여성이 등장한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윤락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은 그럼에도 미군부대 이전 계획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기지촌을 떠나지 않는다.

▲ 영화 <거미의 땅> 스틸 이미지

기존 다큐멘터리와 달리 난해한 요소가 대거 등장하는 <거미의 땅>은 출연자의 인터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그녀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기울인다. 제3자의 내레이션이 가미되긴 하지만, 대상에 대한 은유와 상징으로 압축되는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기지촌에 살고 있거나 혹은 살았던 여성들이 지금은 폐허가 된 그 장소를 맴돌고 있는 장면만 하염없이 나오는 이 영화는 참으로 불친절하고도 어렵다.

기지촌의 역사, 미군 위안부를 둘러싼 숨겨진 진실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심층취재 방식을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아니, <그것이 알고 싶다-몽키하우스>처럼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파헤치는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미군 위안부들의 비극적인 삶과 그 속에 숨겨진 끔찍한 비밀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일찌감치 <아메리칸 엘리>(2008)을 제작하며, 기지촌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에 주목해오던 김동령 감독 또한 이러한 연출 방식이 관객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동령 감독은 현대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실험적인 영상으로 기지촌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의 애환을 담고자 한다.

▲ 영화 <거미의 땅> 공식 포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못지않게, <거미의 땅>이 중요하게 바라보는 요소는 ‘공간’이다. 마치 스틸 사진을 보는 것처럼 기지촌 주변의 풍경을 느린 정지컷으로 담아낸 오프닝부터, 흑인 혼혈인 안성자가 배회하는 건물들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허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지난날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는 악몽 같은 공간이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지 선뜻 잡히지 않는 이 미스테리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것은 망각과 기억이다.

한때 외화벌이를 위해 정부가 개입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쉬쉬 해야만 했던 이야기 속에서 미군 위안부는 언제나 죄인이었고, 그녀들과 관련된 끔찍한 비밀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잊혀지고 있었다. 이제 예전처럼 기지촌이 활성화되지 않고, 기지촌 산업을 지탱하는 미군들도 하나둘씩 떠난 자리에 사람들은 기지촌에 얽힌 과거들을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번쩍이는 고층건물을 지어 올려 영광스러운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기지촌의 역사를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가운데, 카메라를 들고 기지촌을 찾아간 박경태, 김동령 감독은 세월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공간을 세밀하게 남겨두고자 한다. 마치 과거에서 온 편지를 들고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는 유령처럼, <거미의 땅>의 카메라는 그렇게 기지촌의 빈 건물들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이제는 기지촌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잊혀질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쉽사리 그 땅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들의 삶을 포착한다.

이 영화는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한국전쟁 이후 정부의 주도 하에 묵인됐던 미군 위안부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철저히 숨겨지고 잊혀지고 있던 트라우마의 한편을 끄집어 올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역사임을 환기시킨다.

카메라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못해도,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진실까지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망각하고 싶었던 과거에서 어렵게 불러들인 유령. 이 어렵고도 마주하기 힘든 이야기를 애써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고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소명이자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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