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응답하라 1988>의 시대적 배경인 1988년은 서울 올림픽으로 대변되는 아름답고 찬란하기만 한 때가 아니었다.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누적된 모순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빈부격차가 가속화되어가던 시기.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복권 당첨으로 부자가 된 김성균네와 보증을 잘못 서 몰락한 성동일 가족으로 나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성동일 때문에 그의 아내 이일화는 언제나 빠듯한 살림을 이어가야 한다. 수학여행 가는 둘째딸 덕선(혜리 분)에게 줄 용돈조차 없어 전전긍긍할 정도다. 일화의 어려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윗집 주인 라미란은 막 삶은 따끈따끈한 옥수수와 함께 만원 몇 장이 담긴 노란 봉투를 건넨다. 덕선이 수학여행 가는 데 용돈 보태라고.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몇년 전 큰아들 정봉(안재홍 분)이 복권에 당첨되기 전까지만 해도,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았던 성균과 미란은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안다. 쌀이 없어 수제비로만 끼니를 때웠던 시절도 있었다. 복권 당첨으로 부자 반열에 올라선 뒤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게 되었지만, 김성균과 라미란은 어려웠던 지난날을 잊지 않는다.

부자가 된 이후에도 성균과 미란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던 이웃들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들의 넉넉하지 않은 형편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가진 자의 적선이 아닌 이웃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 벼락부자가 된 이후에도 미란이 쌍문동 골목의 큰 형님으로 동네 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이유다.

지난 13일 방영한 <응답하라 1988> 3회의 테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반지하방에서 어렵게 사는 성동일네는 덕선이에게 반 친구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 사줄 돈도, 난생 처음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줄 용돈도 없다. 바닥을 드러낸 크림을 어떻게든 쥐어짜내어 간신히 찍어 바르는 것이 엄마 일화에겐 보통일이다. 그럼에도 집안의 가장 동일은 힘들게 사는 누군가를 위해서 매일 한보따리씩 무언가 사들고 들어온다. 내 코가 석자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생각한단 말인가. 일화는 사람이 너무 좋은 동일이 속상할 뿐이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풍성한 용돈과 마이마이(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주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덕선과 막내아들 노을(최성원 분)은 일찌감치 각자도생의 길을 택한다. 덕선은 수학여행 장기자랑 1등 상품 마이마이를 타기 위해 몸치임에도 필사적으로 소방차 안무를 연습하고, 노을이는 용돈벌이를 위해 일일찻집을 운영하다가 선생님에게 들킨다. 다행히 덕선은 골목친구들 선우(고경표 분), 정환(류준열 분), 동룡(이동휘 분)의 도움으로 그토록 원하던 마이마이를 손에 넣게 되고, 노을이는 며칠 화장실 청소하는 처벌을 받는 데 그친다.

오랜 골목 친구들의 우정, 어려운 환경에서도 구김살 없이 잘 크고 있는 속 깊은 아들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이날 펼쳐진 ‘유전무죄 무전유죄’ 에피소드는 마냥 가볍지 않았다. 쌍문동 골목친구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그날 서울 한복판에는 강도 인질극이 벌어졌으며, 아들 노을이 용돈 때문에 일일찻집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화의 한숨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열심히 일해도 소수에게만 부가 집중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성동일의 큰딸 보라(류혜영 분)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소설을 읽으며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았던 1988년이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27년이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사회구조적 원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묻지마 범죄는 크게 증가하였으며, 민주주의는 더 후퇴한 상태다. 사회를 향한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가진 자를 위한 세상은 더 견고해질 뿐이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결국 <응답하라 1988>의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말하고 싶은 것은 27년 전 옛날이야기가 아닌, 2015년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그때가 살기가 더 좋았다고.

그렇다. 그때는 이웃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선뜻 거금을 빌려주는 라미란 같이 인심 좋은 아주머니도 있었고, 주인집, 셋집 구분 없이 화목하게 잘 지냈다. 가진 재산과 직업에 따라 사는 동네도, 아파트에 따라 자식이 다니는 학교도 철저히 구분되는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이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자식들의 수저 계급이 철저히 나눠지고 편가르기, 구분짓기가 만연한 요즘, 부유한 김성균 가족, 그렇지 못한 성동일 가족이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오손도손 지내는 모습을 그려내는 <응답하라 1988>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불어 함께 살자고. 날로 각박해지는 세태 속에서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응답하라 1988>은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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