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은 80년대 중후반,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1988년은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에게 미지의 세계다. 분명 그때 이웃집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목이 터져라 ‘손에 손잡고’를 불렀다는 엄마의 목격담과 그걸 뒷받침해주는 사진들이 있긴 하지만, 도무지 내 기억에서 1988년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무의식 저 건너편 아래로 흐릿하게 사라져버린 내 유년시절이다.

그래서 tvN <응답하라 1988> 첫 회는 생소 그 자체였다. 어릴 적 주택이 빼곡히 밀집되어 있는 주택가에 살아서 <응답하라 1988>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쌍문동 골목길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쌍문동 골목 친구 5인방들이 엄마의 심부름으로 서로의 집에 반찬 배달을 나서는 장면은 약간 충격에 가까웠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물론 지금도 가깝게 지내는 이웃 사람들끼리 음식도 나눠먹고 찬거리도 교환한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이 쌍문동 골목 친구 5인방의 반찬 심부름 씬을 통해 말하고자 한 건, "그때는 이웃들끼리 반찬을 나눠먹는 풍습이 있었다”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정’, <응답하라 1988>은 지금은 보기 드문 정겨운 골목길 풍경을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있었다.

성동일, 이일화의 둘째딸 성덕선(혜리 분)이 88 서울올림픽 피켓걸로 TV 화면에 등장했을 때, 성동일, 이일화의 집뿐만 아니라 쌍문동 골목길에 사는 이웃들 모두 마치 내 아들, 딸이 올림픽 피켓걸이 된 것 마냥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또한 주인집인 김성균, 라미란 가족과 반지하에 세 들어 사는 성동일, 이일화 가족은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알고 있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1988년이 마냥 훈훈하기만 했던 시절은 아니었다. 초고속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격차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표면화되던 시기였고, <응답하라 1988>은 당대 세태를 윗집에서 호화롭게 사는 김성균네, 반지하에서 어렵게 사는 성동일네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성동일네 가족과 김성균의 가족은 주인 의식, 세 들어 산다는 피해의식 없이 하하호호 각별하게 잘 지낸다. ‘갑질’ 모드가 횡행하는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1988년은 서울올림픽으로 기억되는 한 해였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나 근대화의 신화를 이룩하여 마침내 지구인 모두가 지켜보는 전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88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첫 회의 문을 연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은 88 서울올림픽이 아니었다.

콩 한 쪽도 나눠먹는 이웃 간의 정, 누군가의 안색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마치 내 일처럼 걱정해주는 분위기.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와는 달리, 기억도 나지 않는 <응답하라 1988>에 격한 공감을 느낄 순 없었지만, <응답하라 1988>이 근래 보았던 어떤 드라마, 영화보다 따뜻하게 느껴진 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정겨운 골목길 풍경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는 빚보증을 잘못 서 반지하방에서 살아도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넉넉했던 것 같다. 부모가 가진 재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식의 직업도 결정된다는 수저계급론 사회, 혹은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2015년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꿈과 희망이 있었던 1988년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느릿느릿한 흐름 속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응답하라 1988>의 첫 회가 2015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유독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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