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추억의 도가니가 끓어오르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특별하다. 10년 전쯤이라면 티비를 보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겠지만, 1988년이라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그것도 그해에 18살이라면 딱 1971년생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최소한 197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만이 이 드라마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원호 피디는 폭망을 미리부터 언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것은 참 묘해서 꼭 겪어봐야 추억하게 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70년대생도 아니고, 80년대생도 아닌 90년대생들도 얼마든지 겪어보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험난한 동시대를 딛고 선 이들이라면 모두가 과거에 기대서 오늘의 낙담을 추스르기 마련인 까닭이다.

‘응답하라 1988’ 시청지도서에도 언급했듯이 1988년에는 참 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그야 물론 한국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했기 때문이다. 그런 들뜬 분위기 덕분이었던지 가요계에도 유례없이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풍성했던 1988년을 추억하자는 것은 아닐 것 같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이번으로 세 번째인 응답하라 시리즈는 풍성함이 아닌 오히려 빈곤함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정규직이 600만을 넘어섰고, 자영업자가 너무 많은 기형적 경제구조에 놓여 있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 1988년보다는 모두들 잘 먹고 잘 살고 있단 점이다. 그런데도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아마도 ‘응답하라 1988’의 인트로에 나오는 장면들이 요즘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울의 끝자락의 동네.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티비를 보는 풍경은 까맣게 잊고 있었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방위훈련이라도 시작된 것일까? 아니다. 봉황당 골목 파란대문집 아줌마가 옆집에 있는 아들에게 밥 먹으라고 소리치는 모습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예나 지금이나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그렇다면 밥 먹으라는 엄마의 부르짖음에 짜증도 날 법한데 이 아이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아이들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1988년, 밥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저녁밥을 먹으러 돌아간 집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시작은 파란대문집 라미란네였다. 늦게 들어온다던 남편이 일찍 온다고 전화가 왔다. 화를 버럭 내면서도 아이들 먹으라고 퍼놓았던 찌개를 다시 냄비에 쏟으며 기다리라고 한다. 아이들도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밥솥에 밥이 없다. 라미란은 아들 정환에게 아랫집 가서 밥 한 공기 얻어오라고 시킨다. 물론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 시각 아랫집, 일화는 양은냄비에 지은 밥이 잘 되어 기분이 좋다. 왜 기분이 좋은지는 석유곤로와 양은냄비로 밥을 지어봤어야 안다. 제일 위에서 푼 밥 한 공기를 덕선에게 들려주고, 덕선은 능숙하게 이불 속에 파묻는다. 그런데 윗집 정환이가 샐러드를 들고 밥을 얻으러 왔다. 밥은 당연히 주는데 샐러드를 받았으니 또 빈손으로 보내지 못한다. 가난한 집 살림이니 별 것은 아니다. 깍두기를 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응답하라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미리부터 웃음부터 날 것이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일화가 내민 깍두기는 한 끼가 아니라 일주일은 먹고도 남을 양이다. 그것을 전해 받은 미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고기불고기를 한 접시 다시 아들 손에 쥐어준다. 그런데 그것이 정환과 덕선네만 오가는 연락선이 아니었다. 내친 김에 그 옆집에도, 그 옆집까지. 아이들은 그렇게 주고받는 반찬들을 들고 골목에서 마주쳤다. 정환은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로 외친다. “이럴 거면 다 같이 먹어”

그 바람에 밥에 된장찌개 하나 올려놓고 시작하려던 엄마가 없는 택이네 식탁에도 그렇게 세 아줌마의 오지랖의 혜택이 그득해졌다. 봉황당 골목 세 아줌마들은 살림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자기 식구들만 먹을 반찬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드라마적 과장이다. 아무리 1988년을 추억으로 미화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이러지는 않았다. 과장되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풍경이다. 그것이 어쩌면 1988년만이 가진 응답하라 시리즈의 최고 무기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봉황당 골목 세 아줌마의 힘이 기대가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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