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택시> 포스터
이란에 예순을 바라보는 한 영화감독이 있다. <거울>(1997), <붉은 황금>(2003), <오프사이드>(2006) 등을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은 201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에 위촉되는 영예를 안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칸 영화제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해 부정선거로 당선된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퇴진 시위 과정을 영화로 만들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석방을 위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 줄리엣 비노쉬 등 영화계 인사들의 탄원서가 이어졌지만, 이란 당국은 그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공화국을 반대하는 내용을 선전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과 함께 20년 동안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 집필 등을 비롯한 영화 제작, 해외 출국, 언론과의 인터뷰 금지라는 중형을 선고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란에서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가택연금 중에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0), <닫힌 커튼>(2013)을 만들며 영화에 대한 열망을 카메라 앞에서 끊임없이 표출해온 감독은 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택시를 직접 몰며, 또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그 영화는 2015년 제65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대상격인 황금곰상을 수상한다. 지난 5일 국내 개봉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다.

이란에서 공식적으로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과 함께 이란에는 자국에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유명한 감독이 있다. <칸다하르>(2001)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다. 자파르 파나히나 모흐센 마흐말바프처럼 반정부활동에 적극 가담하여 곤욕을 치른 적은 없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또한 이란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상태다.

이렇게 거장들의 영화 활동을 제약하는 악명 높은 영화검열국임에도 불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 자파르 파나히에 이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의 아쉬가르 파르하디, <와즈다>(2012) 하이파 알-만수르, <택시>(2014)의 레자 미르카리미 등 전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신인감독들이 꾸준히 나오는 이란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강국 중 하나다.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적절히 버무려진 페이크 다큐를 표방한다. 택시기사로 분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하루 종일 택시를 몰며, 택시를 탄 승객들의 이모저모를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다.

▲ 영화 <택시> 스틸 이미지
기존 극영화 촬영 현장처럼 많은 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자파르 파하니 감독은 차 안에 부착한 카메라, 휴대폰 카메라, 조카의 디지털 카메라 등 다양한 소형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여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자파르 파하니는 값비싼 촬영 장비 없이도 훌륭한 영화 한 편을 뚝딱 완성해낸다.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억압된 현실에서 적은 장비로 최대한 돈 안들이고 찍을 수 있는 영화 제작 방식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이란은 영화를 상영하고 배급할 수 있는 조건이 엄격하고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국가다. 그래서 전 세계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휩쓰는 자국 감독들의 영화 대부분을 정작 이란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정부 당국에 의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대부분의 요소를 거세당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택시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디지털 기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영화를 만든다. 그 어떤 방해와 제약도 감독의 영화를 향한 열정과 새로운 영화형식에 대한 실험을 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자신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존에 없던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기회로 작동시키고 있었다.

▲ 영화 <택시> 스틸 이미지
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있음에도 이란의 영화 창작자들은 이란의 현실을 담은 영화 만들기의 꿈을 잃지 않는다. 자국 내에서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고 수십 년간 영화 제작이 금지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결코 영화를 놓지 않는다. 이란 영화가 전 세계 영화인들을 꾸준히 사로잡는 비결은 억압 속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이란 감독들의 창작 의지에 있었다.

이란과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영화 제작에 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영화 현실도 이란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란처럼 영화를 상영할 수 없는 조건들이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있는 것이 아닌데도, 상영 기회 한 번 가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영화들이 상당수이다. 독립, 예술 영화를 볼 수 있는 전용관들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축소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나마 있던 다양성 영화 상영관 시장 또한 대기업 멀티플렉스인 CJ CGV가 ‘CGV 아트하우스’를 내세우며 일정부분 잠식한 상태다.

▲ 영화 <택시> 스틸 이미지
영화와 자본은 필수불가분의 관계다. 자본이 있어야 영화를 만들고 상영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 영화관은 많지만 개봉 중인 모든 영화를 골고루 볼 수 없다. 올해 베를린 황금곰상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를 상영하는 극장은 대한민국 통틀어 19개라고 한다. 그만큼 상영 기회도 잡지 못하고 잊혀지는 영화도 부지기수다. 독립, 예술 영화를 보려면 전국의 몇 안 되는 독립, 예술 전용관을 발품 팔아 힘겹게 찾든가, 아니면 없는 시간 쪼개어 매년 부산, 전주 등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가야한다.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들 상영하지 못하는 좋은 영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 또한 우리 영화계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에 여러모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안겨줄 수 있는 걸작임에도, 정작 이 영화를 보려면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이것이 대기업 투자, 배급을 받은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들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처한 현실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러한 위기를 감지한 몇몇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상영공동체’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제작 일선에서도 젊은 독립예술인들이 집단으로 뭉쳐 함께 작품을 만드는 시도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이란 당국에게 20년간 영화제작금지 처분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가 ‘대안적인’ 방식으로 <택시>를 만들었듯, 지금 대한민국에도 기존 상영관, 제작 환경의 틀에서 벗어난 문화 공동체 활동이 시작하고 있다.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자파르 파나히 감독처럼,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과 도전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다양한 취향과 생각이 존중되고, 그에 맞게 문화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좋은 작품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고 영화 산업 또한 계속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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