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를 당연히 알기에 발레 <왕자 호동>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투오넬라의 백조>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투오넬라’라는 단어가 핀란드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투오넬라’는 핀란드의 전설에서는 황천, 저승으로 통용되는 의미, ‘투오넬라의 백조’는 저승의 백조, 황천의 백조라는 뜻을 갖는다.

백조 하면 화이트 스완, 곧 흰색의 백조를 연상하기 쉽지만 황천은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를 갖기 쉽다. 그래서 ‘투오넬라의 백조’는 흰색의 백조가 아닌 흑조, 블랙 스완이다. 그런데 이런 흑조가 헤어드라이기로 백조로 탈바꿈한다. 하얀 색으로 탈바꿈하는 정화의식을 갖게 된다.

▲ ‘투오넬라의 백조’ 공연 장면 ⓒ예술의전당
그런데 이상하다. 대개의 전설이나 설화에서 정화의식은 일정 부분의 속죄나 희생이 수반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투오넬라의 백조는 적극적인 방식의 대가가 이뤄지지 않은 채 가만히 있다가 수동적으로 정화의식을 갖는다. 거저먹는 정화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정화의식을 가진 백조가 무임승차를 한 탓일까.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무용수가 백조에게 다가오더니 백조의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백조의 원래 정체성인 흑조의 색깔인 검은색 수트로 죽은 백조를 감싼 채 퇴장한다. 하얀 색으로 바뀌는 정화의식을 갖기 전에 일정 부분의 대가가 치러지지 않은 대가를 백조의 ‘죽음’으로 치른다.

하지만 ‘투오넬라의 백조’가 죽음을 맞이하면서부터는 이집트 신화 속 ‘오시리스’와 연관성을 맺기 시작한다. 오시리스는 동생에게 살해당해 사지가 찢겨 흩어지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명계를 다스리는 신이 된다. 투오넬라의 백조 역시 죽음 가운데서 머무르지 않고 무용수의 다양한 오브제로 활용되는 ‘부활하는 백조’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죽음을 당하기 전에는 백조의 형태라는 고정된 이미지밖에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을 맞고 부활해서는 백조의 형태뿐만 아니라 무용수의 팔이 백조의 몸뚱이와 날개가 되고, 무용수의 다리가 백조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백조는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부유하는 듯하면서 무용수와 하나 되는 방식의 다면적인 방식으로 변신한다. 죽음이라는 대가가 부활한 다음부터는 다양한 모습으로의 변신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셈. 심지어 백조는 남자 무용수의 ‘팔루스’로도 변신하기까지 한다.

▲ ‘투오넬라의 백조’ 공연 장면 ⓒ예술의전당
무용수의 물리적인 몸짓을 하나도 거부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듯하던, 약하게 보이기만 하는 투오넬라의 백조가 다양한 무용수의 오브제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하고, 심지어는 무용수의 육체를 잠식한다는 건 죽음 이후로 얻은 ‘부활’의 대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약해보이는 백조가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도 내포하는 무용이다.

정화의식에 무임승차한 대가로 치러진 죽음이라는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고 나서는 정화의식을 치르기 전보다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면서도 더욱 강해질 수 있었던 ‘투오넬라의 백조’는 정화의식과 대가, 부활의 코드로 읽을 수 있는 무용임과 동시에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도 담고 있는 다면적인 해석이 가능한 무용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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