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면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다른 누군가가 고인이 살아있을 동안에 목소리를 녹음한 후 장난이나 협박용으로 전화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 심령학회에서 보고되는 것처럼 정말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모골이 송연한 경우다. ‘더 폰’의 고동호(손현주 분)는 죽은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전자일 거라고 예측하고는 전화를 건 아내를 다그치기 바쁘다.

‘더 폰'이 타임슬립 류의 영화라면 고동호는 1년 전 죽을 운명을 맞이하는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날아가 고군분투할 것이다. 하지만 ’더 폰‘의 타임 리프 설정은 고동호로 하여금 과거로 되돌리는 마법까지는 선사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 속 마법이 선사하는 것은 1년 전에 죽은 아내와의 전화를 연결해줌으로 어떡하면 아내가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해갈 수 있는가를 고동호가 고민하게 만드는 타임 리프 방식의 마법이다.

▲ 영화 <더 폰> 스틸 이미지
고동호는 아내의 시점에 있어서는 ‘예언자’의 위치에 서 있다. 1년 전의 아내는 모르지만 남편인 고동호는 아내가 어떤 미래를 맞이하는가를 알고 있기에, 고동호는 아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예언자 자리에 설 수 있는 셈이다. 1년 전 아내가 맞이하는 죽을 운명을, 고동호가 하라는 대로 아내가 따라준다면 아내는 죽음을 피할 수 있기에 고동호는 결사적으로 아내의 과거를 바꿔야만 한다.

과거를 바꿈으로 말미암아 현재를 건전하게 개선하고자 하는 고동호의 욕구는 이미 ‘나비효과’를 통해 제시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더 폰’은 ‘나비효과’와는 분명히 다른 영화다. ‘나비효과’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타임슬립해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조작하거나, 과거 속 인물의 행동을 개선함으로 현재를 바꾸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하지만 ‘나비효과’ 속 현실이 그리 쉽게 바뀌던가. 주인공 애쉬튼 커쳐가 온갖 애를 써서 과거를 바꿔놓으면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이 헝클어지는 식으로 주인공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꼬이기만 한다. 심지어는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는 멀쩡하던 인물이 현재로 되돌아와 보니 엉망으로 꼬인 경우를 ‘나비효과’에서 보지 않았던가.

▲ 영화 <더 폰> 스틸 이미지
‘더 폰’은 ‘나비효과’처럼 타임 슬립 영화가 아니다. 고동호가 아내를 살리고 싶다고 해서 고동호의 육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타임 리프라는 한계가 고동호에겐 도사리고 있다. 1년 전의 아내와 연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끈인 휴대폰을 매개로 해서 과거를 바꾸되, 고동호의 전화를 통해 달라진 과거가 현실에서 반드시 고동호에게 유리하게 변하지만은 않는다는 점도 ‘나비효과’와 유사점을 갖는다.

하지만 ‘나비효과’가 과거를 바꾼다고 해서 현재가 개선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절망의 타림 슬립’이었다면, ‘더 폰’은 죽은 아내와의 통화라는 타임 리프를 통해 현재가 개선되는 것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희망의 타임 리프’라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는 타임 리프를 통해 가족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대본의 힘이 영화 안에 반영된 까닭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청계천에 빠뜨린 고동호의 휴대폰이 고장 나지 않고 멀쩡하게 작동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분명 옥에 티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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