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정치공학적 해석은 “그럴 줄 알았다”이다. 자칭 타칭 전문가들은 선거 결과에 미친 요인들을 정합의 형식을 빌려 정교하게 재구성한다. 접전을 펼친 선거일수록, 대세론이 뒤집힌 선거라면 더더욱, 아귀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 비록 사후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날카로운 정신분석학자이면서, 탁월한 사회심리학자이고, 계가의 달인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거판에 대한 우리의 인지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매트릭스 세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 곧장 이동하고 만다.

▲ 12대 KBS 노동조합 정-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 (좌측부터 강동구-최재훈, 박종원-박정호, 문철로-한대희, 김영한-김병국) ⓒKBS노조
KBS 노조 선거가 끝났다. 전문가스런 분석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정 직군의 표심이 66표 차의 승패를 갈랐고, 그 직군은 위원장에 당선된 후보가 속한 바로 그 직군이자, 급변하는 매체환경에서 구조조정의 우선순위에 들 가능성이 높은 직군이며(선거를 앞두고 실제 구체적인 소문이 유령처럼 배회했으며), 그래서 공영방송 독립 사수라는 정치적 명분 대신 고용안정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이는 ‘내 식구’(우리가 남이가)에 표심이 기울었고, 사측이 음으로 양으로 그 직군 사람들을 부추긴 것도 조금은 보탬이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기호 1번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사실이 공영방송 KBS의 앞날은 물론 한국언론의 앞날,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대중의 삶에 어두운 잿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건 명백한 정세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에겐 쉽게 입증이 된다. KBS에서 국물 한방울 얻어먹을 일 없는 나조차 ‘일개’ 노조 선거 결과를 앞두고 가슴이 우둔거렸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승리’에 대한 정치공학적 분석이 아니다. 어렵고 두렵더라도 우리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돼야 한다.

그건 ‘패배’에 대한 정치공학적 분석에 착수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기호 1번을 찍은 KBS 노동대중들을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은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실존상황과 심리상태를 간파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선거에 나섰다면 당연히 먼저 했어야 할 일이다. 당연히 먼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했기에 패배했다는 게 내 얼치기 정치공학적 분석이다. 그들은 ‘우리가 남이가’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1번에 매달렸던 건 아닐까.

KBS 노조 선거 결과는 지난 7월말 서울시민들이 공정택씨를 교육감으로 뽑았을 때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1, 2위 후보 사이 바짝 붙은 표 차이도 그렇고, 현 권력 또는 그 계승세력이 승리한 것도 그렇고, 그들이 (국가/사업장의) 상층 권력과 한배를 탔다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두 선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서울시교육감 선거 결과는 계층투표(부자 대 서민)이자 지역투표(강남 대 비강남), 다시 말해 기득권에 대한 각자의 정체성을 온전히 투사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KBS 노조 선거가 대중이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히고 뒤틀려 투사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방송사 내부 대중권력에 대해서는 모든 직군(물론 정규직에 한해)이 1인1표의 평등한 접근권을 갖는다. 하지만 안팎에서의 위상은 누가 뭐래도 기자와 피디가 우위에 있다. (공채 3기라는 이병순 사장은 기자 출신이며, 다른 방송사 사장도 기자 출신과 피디 출신이 번갈아가며 맡는다.) 기호 1번은 그쪽 출신이 아니며, 기호 4번은 그쪽 출신이다. 그쪽 직군이 아닌 노동대중들이 기호 1번을 선택했다면 정체성을 투사한 투표를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직군 변수로만 설명하기에는 정치 지형도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 ⓒKBS노조
기호 1번은 대중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이고, 최고권력이 밀어주는 위임권력 성격도 있다. 1번을 찍은 KBS 노동대중은 말하자면 기득권, 강자에게 정체성을 투사한 셈이다. 강자가 아니면서 강자에게 정체성을 투사한 이들, 이를테면 1번 후보와 같은 직군의 노동대중의 선택은 그만큼 복잡하다. 그들은 사내 위상에서, 그리고 생존의 위기 앞에서 취약하고, 그래서 자신들의 처지에 동병상련하면서도 사내 최고권력의 위임권력인 강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복잡한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남이면 큰일 난다.

여기서 패배의 정치공학적 분석이 나온다. 지난 대선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프레임’이라는 정치마케팅 용어를 빌려보자. 이번 선거는 공영방송 사수 프레임 대 생존권 사수 프레임의 대결이었고, 후자가 이겼다. 기호 4번도 생존권 사수(구조조정 저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사내 노동대중들 눈에는 공영방송 사수 공약의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프레임 자체가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사수와 생존권 사수를 단순 병렬 배치한 결과다. 그래봐야 둘은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기호 1번에 주로 투표한 직군 노동대중들의 실존과 심리를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기호 4번은 공영방송 사수와 생존권 사수가 배척과 모순의 관계가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임을 적극적으로 설득했어야 한다. ‘공영방송을 지켜야 일자리도 지킬 수 있다’는 명제를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다. ‘독립을 포기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명제와 정확히 대립각만 세우면 되는 것이다. 공영방송 사수 대 생존권 사수에서 경합관계에 놓이는 것은 ‘가치’이지만,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영방송을 지킬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에서는 ‘현실성’이 경합한다.

같은 직군 노조위원장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직군 노동자이기 전에 현실의 막강한 권력이다. 그의 권력기반이 ‘친정 프렌들리’하게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가다 출신 이명박 대통령은 가락시장 할머니에게 “아깝지만” 20년 된 목도리를 선물할지언정 노가다의 생존권에는 관심이 없다. 강부자·고소영의 대통령일 뿐이다. 기호 1번은 뚝심과 의리의 돌쇠인가? 아, 그런 사람이 노조 부위원장으로서, 피의 숙청을 당하고 귀양 떠나는 조합원들을 등진 채 전라도 섬으로 1박2일 엠티를 간단 말인가?

더구나 기호 1번은 사내 최고권력의 우산 아래 있고, ‘관제사장’으로 불리는 사내 최고권력은 다시 정권의 그늘 아래 있고, 그 정권은 한사코 KBS를 구조조정해 재벌과 조중동에게 선물하겠다고 하는데, 관제사장이 기호 1번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관제사장은 다시 정권을 설득하고, 마침내 정권이 관제사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KBS 구조조정은 없던 일로 하고, 그러나 수신료는 현실화함과 동시에, 다시 재벌과 조중동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역학구조를 보면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다면 먹이사슬 최하단부에 있는 건 과연 누군가?

기호 4번은 노동대중들, 특히 기호 1번과 같은 직군의 노동대중들에게 그렇게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선거의 프레임도 바뀌고,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묻지 못한 건 정치마케팅의 실패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들의 실존상황과 심리상태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앞에서 굳이 기자와 피디의 대내외 위상을 언급한 것도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호 4번은 혹 생존의 문제가 덜 급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공영방송 사수를 ‘정치적 명분’ 안에 가두고, 생존권 사수를 정치적 명분 아래에 배치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대중은 빈번히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을 선택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욕망은 물론 존재까지 배반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일 뿐더러 ‘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의 그런 선택 행위는 내부의 패턴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유인되거나 강제된 것일 뿐이다. 자신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권력이 없을 때, 그들은 자신을 위하는 것인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의 비상구를 열어젖힌다. 그래서 (민족/인종/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놓고 숭배하는 집단이 지배계층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기호 4번처럼 하면 YTN 꼴이 난다”는 기호 1번의 프로파간다는 내가 봐온 수많은 선거 가운데 가장 저열한 것이었다. 그건 소수자 인권을 지키기 위해 거리에 선 1인 시위자를 가리키며, 어린 자식에게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렇게 된다”고 가르치는 극성스런 공정택 지지자보다 질이 나쁘다. 기호 1번을 선택한 노동대중들의 심리상태는 지금 그 엄마 말을 믿어버린 순박한 자식의 그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엄마의 그 자식은 국제중과 특목고, 그리고 일류대의 폐쇄회로 안에서 끝내 안락하겠지만, 그들은 아니다. 곧 배반과 실존의 위기에 노출될 것이다. 그들의 실존상황과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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