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정부가 세법 개정안을 내놓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민주당은 곧바로 ‘세금폭탄’이라며 혹세무민으로 대응했다. 이 세법 개정안의 핵심은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소득공제는 고소득자에, 세액공제는 저소득자에 유리하다. 저소득자에게 유리한 제도를 ‘세금폭탄’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누구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가.

복지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민주당은 주말 사이에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은 그 전문가들을 비난했다.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지만 대중 정치를 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들이 말하는 ‘대중’이 누구인지 보자. 정부가 당초 제시한 안에 따르면 공제액이 줄어들어 사실상의 증세 효과가 발생하는 이는 연봉 3450만원부터였다. 연봉 3450만원 소득자는, 세법 개정안을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서민층’으로 비쳐졌는지 모르지만, 근로소득자의 상위 28% 수준이다. 그리고 연봉 3450만원 소득자와 연봉 1억원 소득자의 추가 세부담 차이가 크므로 이것이야말로 ‘부자 증세’에 가까웠다. 또, 이 안에 따르면 나머지 72%는 세액공제 전환으로 되레 세 부담이 줄어들었다. ‘보편 증세’라 하기에도 열적은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제1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를 서민 괴롭히는 세금폭탄이라고 떠든 것이다. 그중에는 연봉 3450만원이 안 되는 사람까지 섞여 있었을 것이다.

두 거대 정당부터 정치라면 한마디씩 거들기 좋아하는 이들까지, 많은 이들이 ‘이삼십 프로의 민주주의’에 갇혀 있다. 아니, ‘이삼십 프로의 민주주의’ 둘레에 장벽을 치고 있다. 이것은 지방정치로 내려오면 더 선명한 현실이 된다. 시민의 정치행위 중 가장 광범위한 것은 단연 선거일 것이다. 가령 구미시 진미동의 2012년 대선 투표율은 60%를 넘었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는 25% 수준이다. 투표 참여자 상당수도 선거와 선거 사이 4년동안 지방정치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도 지방정치는 굴러간다. 돈 있고 시간 넉넉한 극소수 주민, 특히 ‘토호’라 불리우는 이들의 주도로 말이다.

진보적·대안적 진영이라면 ‘같은 도시, 다른 세계’에 사는 저런 사람들이 쳐놓은 철조망을 끊어내는 일이 제1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구미처럼 투표율이 낮으며 투표자의 다수는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나머지 소수조차 깊은 고려 없이 무작정 제1야당에 투표하는 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동안 소외되고 배제된 시민들을 만나러 나서야 한다.

그 출입구 가운데 하나가 ‘비정규직 문제’다. 진보적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는 누구나가 그 중요성을 알고, 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몇 차례 겪으며 시의회 의원 시절 ‘구미시 비정규직 권리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대표발의해 제정한 바도 있지만, 지난해 지방선거 운동 와중에 식당에서 만난 6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한 번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여성 셋, 남성 셋이었고 40대 중반께였다.

그들과 대화하던 도중, 얼핏 보고 들었던 예감 두 가지가 깨졌다. 세 쌍의 부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친구 사이였다. 두 번째, 그들은 내가 어릴 때 보던 ‘40대 중반’이 아니었다. 직장이나 자영업에 안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여섯 명 모두 간접고용 노동자들이었다. “동상(동생), 이 잔만 받고 얼른 또 가서 선거운동해야지” 하던 여자 분부터 처음에 “지방의원에게 월급을 왜 주냐”며 취기 섞인 비판을 하던 남자 분까지 모두가 같은 처지였고 한목소리였다. “비정규직! 아웃소싱! 이게 제일로 문제요.”

구미시나 지역 국회의원이 활동 가운데 가장 자랑하고는 하는 것이 대규모 투자 유치다. 투자 기업에게는 시예산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도 한다. 대구광역시의 경우 S모 기업에 무려 투자금액의 10%를 넘는 인센티브를 지급했는데, 구미시의 공무원이나 일부 시의원들, 몇몇 지역언론은 “대구도 저러는데 우리는 더 줘야 한다”고 떠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인센티브 금액을 기업이 어떻게 쓰는지 아예 공개되지 않을 뿐더러, 투자 이후 창출된 일자리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는 지역 주류 세력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구미는 그래도 일자리가 많아 복받은 거다. 비정규직이면 어떤가. 일자리가 있는데”라고 태연하게 지껄이기도 하고, 간접고용직 노동자들을 두고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되었으니) 정규직’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2014년 12월 구미시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역임금노동자 12만 3천명 중 29%가 비정규직이라는데,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여기 충분히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 지난 7월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와 아사히 사내하청노동조합이 도급계약 일방해지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나는 작년 말께부터 분명히 구미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크게 터질 거라는 예감을 가졌다. 어렴풋한 예감은 아사히글라스 공장에서 현실이 되었다. 이 공장은 2012년 구미 불산 사태 직후 나무들이 누렇게 죽은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이 계속 일해야 했던 구미국가산업단지 제4단지(구미 4공단)에 위치하고 있다. 구미 4공단은 ‘무노조 특구’였다. 여기서 최초의 노동조합, 그것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생긴 것이다. 사내유보금 7200억원, 연평균 매출 1조원의 아사히초자화인테크노한국(주)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3교대와 주야 맞교대를 번갈아 하며 9년 내내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았다. 관리자에게 찍힌 직원은 ‘조끼 입히기’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권고사직과 집단해고도 횡행했다. 결국 3개 사내하청업체 중 한 군데의 노동자들이 지난 5월 말 노조를 결성했다.

그러자 원청측은 하청과의 도급계약을 해지해버렸다. 당초 계약기간은 올해 12월 20일까지였다. 9년간의 연장되어왔던 계약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 업체와의 계약만 해지했다. 이 업체 소속 하청노동자들은 해고되었다. 명백하게 노조 결성에 대한 보복이다. 남은 사내하청업체측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가입하면 해고한다”고 협박했다.

아사히글라스는 구미시의 각별한 환대와 돌봄을 통해 구미공단에 자리잡은 기업이다. 노동자들이 농성 천막을 설치하자 구미시가 이례적으로 즉시 철거를 시도할 만큼이다. 남유진 구미시장은 예전 “노사 갈등에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는 내게 “일본 기업들이 분규를 싫어한다. 투자 유치에 방해가 된다”고 말했었다.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조는 길거리 서명을 통해 구미시를 압박하는 청원을 조직하고 있다. 이 서명운동은 놀라운 기세로 이뤄지고 있다. 구미역 광장 서명대에는 행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나를 제외하고 직업적 활동가가 없는 녹색당 구미당원모임은 크게 노동자들 거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하기로 했다. 첫째는 구미시가 공공부문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를 방치하고 있음을 폭로해 시를 압박하는 것이다. 지난 8월 16일 우리는 구미시 비정규직 권리보호 조례가 무력화되었음을 공개했다. 둘째, 다국적기업인 아사히글라스를 세계 각국의 녹색당과 연대해 압박하는 것으로 현재 추진중이다.

그리고 풀뿌리시민모임인 ‘구미새로고침’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상담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노조도 없이 각박한 노동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부터 만나기로 했다.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상담을 실시하기로 하고 구미 시민들이 가입된 페이스북 그룹으로 이를 알렸다. 그룹에는 예전부터 종종 용역업체의 먹튀에 당한 사연 등이 올라오기도 했다. 관심을 보여주는 청년들도 있었고, 제 친구에게 “이런 게 있다는 걸 참고하라”고 일러두는 사람도 있었다.

청소년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노동법에 제법 해박한 후배가 3일동안 출근해 상담을 돕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상담실에는 파리가 날렸다. 마지막날에는 4명의 회원이 모여 ‘우리 모두 각자 노동권 지킴이가 되자’는 교육을 실시하고 이번 사업은 막을 내렸다. 선뜻 찾아오는 노동자가 드물 것임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꼼꼼이 상담을 준비한 후배에게 참 미안했다.

‘노동상담’을 구미새로고침 풀뿌리사랑방의 간판에 내건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찾아온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김수민 / 경북녹색당 사무처장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돼 개혁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말 민주노동당이 분리된 후 진보신당에 몸을 담았다가 2009년 탈당해 출마를 결심하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가 무소속으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대형폐기물 민간위탁을 막는 조례를 재개정하고 구미 단수 사태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수자원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부분 승소하는 등 모범적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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