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객을 위한 호텔 한 개가 있다. 이 건축물의 지반 밑만 강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 무너질 위험이 없다. 이 호텔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지반의 하층부에는 맨틀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이 호텔 옆에는 또 다른 호텔들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누군가 이 호텔 옆에 다른 호텔을 지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금지하고 있는 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받아들여졌다. 또 다른 호텔들을 지을 수 없도록 하고 있어 평등권 위반이며, 호텔을 지어 영업할 수 있는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단, 조건이 붙었다. 호텔을 너무 많이 지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한 개를 더 짓든, 두 개를 더 짓든, 세 개를 더 짓든 그 호텔들의 지반 밑에는 맨틀이 꿈틀거리는데 말이다.

▲ 헌법재판소ⓒ미디어스
지난 11월27일 헌법재판소는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가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를 전담하도록 한 방송법 제73조 제5항(시행령 제59조 제3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 내용이 정확히 위의 상황이다. 위헌 결정을 받은 방송법 조항은 코바코만이 지상파 방송 판매를 전담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지난해 1월 코바코가 출자한 방송광고판매대행사(미디어렙)들도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를 대행할 수 있도록 시행령이 바뀌기는 했다. 코바코 이외의 미디어렙을 논리적으로는 도입하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게 해놓은 것이다. 코바코가 출자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억지스럽게 보일 정도의 이런 고육책을 쓴 이유는, 코바코 체제가 ‘미디어 다양성, 이를 통한 여론 다양성의 확보’에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헌재 재판관 9명 중 6명은 ‘제한경쟁체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문제의 방송법 조항이 평등권 및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불일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내년 12월 말까지 방송법을 개정하라고 밝혔다. 다른 재판관 한 명은 아예 지금 당장 코바코 체제를 해체하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미디어렙에 지상파 방송광고판매를 위탁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고 밝혔다. 마지막 한 명은 방송법 제73조 제5항은 위헌이 아니며, 시행령 제59조 제3항만 평등권과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설명했다.

재판관 6명은 ‘실질적인 제한경쟁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방안을 친절하게 설명까지 했다. 그것이 참 묘하다. “이 사건 규정(방송법 제73조 제5항과 시행령 제59조 제3항)이 목표로 하는 방송의 공공성, 공익성, 다양성을 보장하고 실질적인 제한경쟁체제를 도입하면서 이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실질적인 제한경쟁체제 역시 기본권(평등권이나 직업수행의 자유)을 침해한다고 내비친 것이다.

“(다만 이런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회가)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대행사업을 일정한 요건, 조직, 시설을 갖춘 업체에 한하여 허가제로 한다든지, 중소 방송국에 일정량의 방송광고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민영 광고판매대행사업자의 설립을 허가한다든지, 방송광고 가격의 상한선을 정한다든지, 특정 장르나 특정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쿼터제를 도입한다든지, 방송사의 출연금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공공성이 높은 프로그램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든지, 허가를 받은 경우에도 방송의 공익성·공정성을 해하는 영업을 할 경우에는 허가를 취소한다든지 하는 등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결정의 핵심을 이루는 이 부분을 뜯어보도록 하자. 두 가지 방향에서 모두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들 재판관 6명이 제한경쟁체가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단지 제한경쟁체제를 주어진 것(the given)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제한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2007년 1월 방송법을 바꿨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 도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아주 편리한 주장이다. 현 정권이 쓰는 표현을 빌리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결정을 내린 꼴이다.

재판관 6명이 열거한 실질적인 제한경쟁체제의 방법을 검토해 보자. 일정한 요건을 갖춘 허가제 도입은 그렇다고 치자. 제한경쟁체제를 하려면 허가제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코바코가 수행하는 중소 방송(또는 취약 방송)에 대한 현재의 연계판매를 쿼터제로 공식화하자거나 방송광고 가격의 상한선을 정하자는 부분이다. 과연 민영 미디어렙 사업자나 방송광고주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방송광고주가 방송광고 판매가 시장 논리에 따라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현재 코바코가 수행하는 연계판매가 불공정거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쿼터제로 이름만 바꾸면 이런 주장이 사라질 수 있다고 헌재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이들 재판관 6명은 광고주나 민영 미디어렙 사업자가 쿼터제나 광고가격 상한선에 대해 위헌심판 청구를 할 경우, ‘위헌 아니다’고 결정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것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재판관 6명은 향후 구도까지 감안한 고도의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현 정권의 일정에 맞춰 내년 12월 말까지 법을 바꾸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점이 한층 더 분명히 드러난다. ‘제한경쟁체제도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내비쳐 완전경쟁체제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까지 감안하면, 현 정권과 완벽하게 코드를 맞춘 정치적 결정으로 승화한다. 현 정권은 지난 10월 코바코 사영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2009년 12월 말까지 경쟁체제 도입 방안 마련/무자본 특수법인인 코바코의 주식회사화(100% 정부 지분 보유)’를 발표했다. 코바코 주식회사화는 완전경쟁체제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이다.

▲ 코바코 ⓒ미디어스
논리적으로 보면, 제한경쟁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그냥 전제하는 이들 6명보다 미디어렙을 통한 지상파 방송광고판매 대행의 위헌 여부부터 따진 재판관 1명이 훨씬 더 충실하다. 코바코 문제를 따지려면, 그 근본에서부터 미디어렙을 통한 방송광고판매가 타당한가, 이것이 기본권 침해에 해당하는가를 결정하고 난 뒤, 기본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가운데 독점체제와 제한경쟁체제, 완전경쟁체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재판관은 아예 미디어렙을 통한 방송광고 판매가 지상파 방송사업자의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미디어렙을 통해 광고를 판매할지, 아니면 자체 영업조직을 통해 판매할지는 지상파 방송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 역시 ‘방송사 자기영업권의 근본적 제한’이라는 차원에서 미디어렙에 접근하는 현 정권의 주장과 완벽히 부합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들 재판관 6명보다 지금 당장 아예 완전경쟁체제 도입을 함의하고 있는 또 다른 재판관의 주장이 훨씬 더 충실하다. 제한경쟁체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현 정권 차원에서도 제한경쟁체제는 2~3년 존속될 수밖에 없는 과도기 체제로 보고 있다. 민영 미디어렙 1개를 도입한다는 게 지금까지 나온 제한경쟁체제의 내용인데, ‘굳이 1개여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MBC가 공영 미디어렙에 포함된다고 해도, 보도를 포함해 지상파에 버금가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민영 미디어렙을 통해 방송광고를 판매하도록 하면 왜 안 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제한경쟁체제가 불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코바코 체제의 해체 이후엔 ‘방송사의 자기영업권’(외국의 사례에 비춰볼 때 여기서 공영방송도 예외는 아니다), ‘미디어렙을 하려는 여러 사업자의 직업수행의 자유와 평등권’을 포함해 ‘무수한 기본권’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런 난립되는 기본권들을 조정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를 버렸다. 바로 코바코 체제가 담보하는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 그것이 파생시키는 미디어 다양성 및 이를 통한 여론 다양성이 그것이다. 미디어 생태계에서 코바코가 수행하는 역할보다 사업자의 직업수행의 자유를 더 앞세웠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없는 금융시스템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신문법에 대한 헌재 결정을 완벽히 무시하던 것과는 달리, 국회의 압도적 다수인 한나라당은 이번 헌재 결정을 충실히 받들 것이다. 그러면 내후년부터 국내 방송광고시장도 중앙은행 없는 금융시장이 될 것이다. 활짝 열린 판도라 상자를 다시 닫기까지 미디어 생태계에는 선혈이 낭자할 것이다. 아니 다시 닫을 수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반면, 현 정권은 천군만마를 얻었다. 제한경쟁체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무수한 기본권 난립’을 헌재가 알아서 교통정리 해주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제한경쟁체제’를 가능하게 한다며 친절하게 방법까지 설명한 재판관 6명의 임기는 2012년 9월15일(김희옥, 김종대, 민형기, 목영준), 2013년 1월21일(이강국), 2013년 3월 하순(송두환)에 걸쳐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이들 재판관 6명은 제한경쟁체제를 상대로 제기되는 위헌청구심판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가며 적극 방어해줄 것이다. 현 정권과 헌재 재판관 6명은 한 배를 탔다. 오호, 통재라, 헌재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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