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된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영역을 한층 다양하게 넓혀 주는 역할을 한다.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다운 받고 PC 모니터로 영화를 보는 것이 새로운 문화생활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된다. 인터넷의 보급과 그에 따른 대중문화 소비 형태 변화의 바람을 타고 2000년에 극장이 아닌 처음부터 인터넷 사용자를 겨냥한 한 편의 단편영화가 선보인다. 바로 '다찌마와 리'. 60년대 정통 액션영화의 문법을 코믹하게 차용한 27분짜리 단편 액션영화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사이에서 초고속광랜만큼의 빠르기로 입소문을 타게 된다.

이 재기발랄한 영화를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인지도를 수직 상승시키는 효과를 얻게 된다. 그가 대중에게 장편영화 감독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은 2002년 '피도 눈물도 없이'였다. 이후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 등을 통해 때로는 밑바닥 인생을 질펀하게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유머코드를 놓지 않는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는 연출 감각을 보여준 류승완 감독은 2010년 '부당거래'를 통해 영화 인생의 턴어라운드를 맞이하게 된다.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가감 없이 질펀하게 보여주고, 그 이면에 담긴 씁쓸한 우리의 현실을 묘사한 '부당거래'는 각종 영화제를 휩쓸면서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그리고 2013년 '베를린'을 통해 류승완 감독은 정통 블록버스터 첩보 장르에 도전함과 동시에, 그의 영원한 콤비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 보는 이들의 오감을 저리게 만드는 고통스런 타격액션이라는 새로운 전매특허를 창출한다. 하지만 '베를린'은 장르 자체가 거대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탓인지 류승완 특유의 질펀함과 재기발랄함은 다소 경직된 상태로 묻혀 버리는 아쉬움도 남겼다.

2015년 여름, 류승완 감독은 영화 '베테랑'을 통해 아예 작정하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주특기들을 종합선물세트처럼 풀어낸다. 우리 사회에서 법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성역 아닌 성역으로 자리잡은 재벌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펼치는 강력반 형사 서도철의 무용담이 영화의 기본 뼈대이다. 망나니이자 인간 말종의 극한을 달리는 재벌 3세 조철오(유아인)와 정의감이 넘치는 열혈 형사 서도철(황정민)의 대결 구도는 영화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핵심이다.

영화의 구도를 보면 2002년 전국 극장가의 관객의 배꼽을 강탈했던 영화 '공공의 적' (강우석 감독, 설경구, 이성재 주연)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다. 바로 갈등의 핵심을 이루는 두 중심인물 (조철오, 서도철)들 못지않게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포커스도 균형감 있게 다루어진단 점이다. 늘 조철오의 옆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 주도면밀한 최상무(유해진)는 돈이라는 권력 앞에서 하염없이 비굴해지는 현대인의 웃픈 단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정의감 넘치는 열혈형사 서도철(황정민) 옆에도 그 못지않게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팀이 있다. 서도철의 든든한 '빽'이 되어주는 오팀장(오달수), 미스봉(장윤주), 윤형사(김시후), 왕형사(오대환) 등은 서도철과 함께 끈끈한 팀웍을 발휘하며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수행한다. 서장으로 등장하는 천호진은 '공공의 적'의 안내상을 연상시키는데, 온갖 압박 속에서도 서도철의 팀을 우회적으로 지원하는 장면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관객들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초반부에는 성룡영화에서 볼 수 있던 슬랩스틱 액션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서도철과 조태오의 맞대결 장면에서는 류승완 감독 특유의 고통스런 타격액션이 스크린을 수놓는다. 또한 영화 후반부의 시내 도심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추격씬은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체중을 눈에 띄게 감량한 황정민은 날쌔고 정의감 넘치는 서도철 형사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발견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유아인이다. 인정미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며, 치기 어리고 악랄한 재벌 3세 역할을 얄밉도록 잘 소화해낸다. 그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오히려 악역 캐릭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치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혈질 서도철의 동선을 따라 좌충우돌하는 이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더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으면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류승완 감독은 과도하게 허구의 영역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다만 복선과 암시를 통해 큰 카타르시스가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 섞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작 '부당거래'와 '베를린'이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면, '베테랑'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청량감 넘치는 액션을 버무리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스트레스와 담을 쌓게 해준다. 올 여름 극장가에 선보인 빅3 영화들 ('암살', '미션임파서블 로그네이션', '베테랑') 중 유머코드와 시원한 액션코드가 돋보이는 '베테랑'은 지난여름 극장가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영화 '해적'의 돌풍 못지않은 흥행 열풍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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