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왕자의 난’이다. 롯데가의 ‘골육상쟁’이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둘째 아들의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창업주를 앞세워 첫째 아들이 등장한 것을 두고 ‘왕자의 난’에 비유를 하는 전형적인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일간지들은 이러한 초유의 사태에 대해 자세히 다루면서 사설에서는 전근대적 재벌기업의 운영이라는 측면의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소 자극적으로 보도하였다는 점은 흠이다.

조선일보는 30일 1면에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29일 밤 귀국하는 모습을 실으면서 일본 롯데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됐음에도 불구하고 양복 깃에 ‘롯데’ 배지를 달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사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이 배지로 볼 때 경영권 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일보 30일자 3면

조선일보는 3면 <신동주는 아버지 설득위해 귀국…신동빈은 日서 株主관리 중>이라는 기사 내용에 <단란했던 신격호 회장 가족>이란 제목의 사진기사를 따로 넣었다. 해당 사진은 1998년경의 신격호 회장 일가를 찍은 사진인데 조선일보는 이 사진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 가족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가족이 조금 떨어져 앉아있다는 점을 들어 이번 분쟁을 예견하는 듯하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신격호 회장의 복잡한 가정사와 자식들끼리의 관계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간 신씨가문의 가족사를 전부 알아야 ‘롯데 왕자의 난’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는 투다.

조선일보는 4면에서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의 전망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를 자세히 다뤘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하단 기사에서 신격호 회장이 형제들과 갈등을 빚어왔다고 쓰기도 했다. 1958년 신철호 전 롯데 사장이 서류를 위조해 신격호 회장의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된 일이 있고 신춘호 농심회장도 라면 출시 문제로 갈등을 겪은 후 부친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으며 신준호 푸르밀 회장 등과도 사업 등을 이유로 갈등관계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보도 태도는 대중의 ‘관음증’적 욕망에 편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부회장 간의 경영권 다툼은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각 주체들의 지분 및 관계, 불거질 수 있는 법적 쟁점 등을 다루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를 통해 이러한 체제를 가능하게 만든 한국적 재벌 중심 경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신격호 회장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나 형제 및 자식들의 개인사 등은 불필요한 정보일 뿐이다. 공론의 형성이라는 공적 역할을 맡고 있는 언론이 재벌 가족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도하며 ‘장사’에 나서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할 수 없다.

▲ 조선일보 30일자 사설

조선일보 스스로도 이런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는 게 민망했던지 사설에서는 나름의 비판을 제기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일보는 <재벌가 피투성이 후계 싸움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롯데그룹 사태는 돈 앞에서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한국 재벌의 민낯을 드러낸 또 하나의 사례다”라면서 외국 가족기업의 경우 오너 일가의 경영권 참여를 제한하고 대주주 일가에 대한 견제 및 감시하는 시스템을 갖춰 경영권 분쟁도 없고 사회적 거부감도 덜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국내 재벌들은 아직도 기업을 오너 일가의 소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재벌들에 대한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날 것이다. 재벌들이 지금처럼 국민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한 거센 역풍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동아일보 30일자 사설

같은 보수언론인 동아일보도 롯데그룹 사태에 대한 비판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비하면 다소 핵심이 모호하다. 동아일보는 이날 <드라마 뺨치는 롯데 ‘형제의 난’, 국민 시선 따갑지 않아>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롯데그룹의 성장이 국민의 성원과 도움에 힘입은 것이라면서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을 단순히 사가(私稼)의 재산 싸움으로 넘겨 버릴 수 없는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이번 사태에 대해 “창업자가 고령이 될 때까지 고방(庫房) 열쇠를 붙잡은 채 일찌감치 분가 구도를 확정해 놓지 않은 탓도 크다”라면서 “경기침체로 대기업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롯데 오너 일가는 조속히 분쟁을 끝내고 경영을 정상화해 사회에 기여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은 전근대적 지배구조의 문제는 지적하지 못한 것이다.

▲ 동아일보 30일자 사설

이날 동아일보 지면에는 같은 문제를 다룬 송평인 논설위원의 칼럼이 함께 실렸는데 여기에 드러난 재벌문제의 관점이 흥미롭다. 송평인 논설위원은 카인과 아벨, 이세민, 이방원, 가족-씨족-부족의 발전단계, 고대 그리스에서 형제애의 가치, 유교 등을 거론하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못해 벌어진 문제가 한국사회의 ‘저신뢰’문제를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평인 논설위원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면서 “고신뢰사회에서는 가족기업이라도 대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자손이 참여해 결국 가족의 의미가 희박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혈연을 벗어난 협력의 더 넓은 길이 열린다”고 썼다. 롯데그룹의 오너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식의 급진적(?) 대안 제시는 피해간 것이다.

삼성이라는 국내 최대의 재벌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앙일보는 좀 더 지능적이다. 중앙일보는 이날 롯데그룹 사태와 관련해 신격호 회장의 상태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지면에 배치했다. 상황인식이나 사고능력이 고령으로 인해 예전같지 못하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휠체어 탄 94세 신격호 회장…“후계자 누구냐” 묻자 “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치매가 아니더라도 90대 중반이면 옛날 기억을 불러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입력해 분석한 다음 의사결정을 내리는 고강도의 뇌 활동은 불가능하다”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발언을 인용하고 신격호 회장의 상태가 의사결정의 법적 효력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했다.

▲ 중앙일보 30일자 칼럼

중앙일보는 <힘을 내요, 수퍼 파워>라는 제목의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명의의 칼럼에서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한다. 김영훈 차장은 “특정 형태가 기업 지배구조의 정답이라는 주장은 강단에선 몰라도 현장에선 하나 마나 한 얘기다”라면서 “훌륭한 전문 경영인이 있지만 자기 실적을 위해 회사 미래를 저당 잡힌 전문 경영인도 있다. 임직원의 모럴 해저드를 막는 게 기업 소유주의 책무인데 소유주의 모럴이 먼저 무너지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김영훈 차장은 “대기업 집단체제가 유의미한 것은 개발연대에 효율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지배구조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창의성을 지휘하는 자리에 서도록 해주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영훈 차장은 “임직원이 누구나 창업자처럼 사고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점이 총수인지 전문 경영인인지는 부차적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앙일보의 이런 주장은 어쩔 수 없이 삼성의 ‘이재용 체제’를 떠올리게 만들 수밖에 없다. 재벌3세의 경영승계에 대해 단지 창업주의 생물학적 자손이라서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맞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경영을 맡기 위한 능력에 대해서도 검증됐다거나 검증이 진행 중이라는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같은 논리가 북한의 독재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북한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2세, 3세 권력에 대해 단지 그들이 ‘백두혈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이끌만한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국가와 기업의 원리를 똑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언론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한 제안을 공격적으로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는 있겠다. 실적을 위해 회사의 미래를 저당잡히는 전문 경영인은 교체할 수 있지만 무능하고 부도덕한 오너 일가의 일원은 많은 경우 교체가 불가능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언론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늘의 신문] 더 찾아보기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