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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 시장이 유례없는 불황을 맞이하여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전반적인 작품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고난 뒤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콘텐츠에 목말라하던 즈음, 영화팬들을 심쿵거리게 할 만한 라인업의 영화가 선을 보였다. 최동훈 감독,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이경영, 조승우, 김해숙 등 이름만 들어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모여서 1930년대 일제 식민지를 배경으로 조선 독립군의 힘겨운 투쟁을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암살'을 탄생시켰다.

최동훈 감독은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이자 '마이더스의 손'이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 2006년 '타짜', 2009년 '전우치', 2012년 '도둑들'까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들이 연달아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표현방식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데뷔 후 줄곧 4연타석 홈런을 터뜨린 셈인데, 지금까지 충무로에서 최동훈 감독처럼 데뷔 후 지속적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경우는 없었다. 최동훈 감독의 주특기는 '케이퍼 무비'(여러 명의 캐릭터가 모여 범죄를 모의하고 계획 후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 마지막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치밀한 구성으로 주목을 받은 최동훈 감독은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제작한 '타짜'에서는 케이퍼 장르에 질펀한 느와르 정서를 입혀냈고, '전우치'에서는 한국민담을 아기자기한 표현법과 스케일 넘치는 액션으로 한국형 무협SF라는 새로운 장르를 일구어냈다. 본인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 히트작인 '도둑들'은 그의 주특기인 케이퍼 무비가 만개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의 다섯 번째 작품에는 이전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가 담겨 있다.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부분인데 우리의 역사 중 가장 어두웠던 시기인 일제 치하를 배경으로 독립군의 암살작전이라는 팩션을 다루고 있다. 암울했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실제 인물들을 혼재시키다 보니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배경음악부터 초반 전개가 사뭇 진중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최동훈 감독 특유의 캐릭터 보여주기와 유머 코드는 빛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표현된다.

최동훈 감독 최고의 장점이자 주특기는 등장하는 캐릭터를 맛깔나게 살려내고 그 캐릭터들에게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나 여배우의 매력을 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염정아를 팜므파탈의 섹시한 매력으로 재구성했으며, '타짜'에서는 김혜수 특유의 농염함과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을 극대화시켰다. 특히나 극 중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간결한 대사는 '타짜'하면 김혜수를 빼놓지 않고 기억하게 만드는 '신의 한 패'였다. '도둑들'에서는 잊혀진 배우로 전락하는 듯싶었던 전지현의 매력을 복원시키다 못해 더욱 화려하게 업그레이드시키면서 그녀로 하여금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만들었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면 '전우치'에 등장한 임수정이었다. 예상보다 극중에서 그녀의 배역이 제한적이었다. 영화가 시종일관 강동원의 매력에 묻히다 보니 임수정의 캐릭터는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암살'에서는 아예 여배우에게 극의 중심을 맡긴다. 마치 영화 속에서 안옥윤(전지현)이 독립군 암살단의 리더를 맡는 것처럼 말이다. '도둑들'을 통해 최동훈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던 전지현은 야구에 비유하면 에이스 투수의 전담 포수처럼 최동훈 감독과 편안하게 호흡을 즐기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만큼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모습이었다.

최동훈 감독은 여배우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부각시키는 재주가 있다. '타짜'에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의 일등공신이었던 '아귀' 역할의 김윤석, '전우치'에서 전우치(강동원) 옆에 늘 단짝처럼 붙어 다니면서 영화의 유머코드를 전담했던 '초랭이' 역할의 유해진 등이 돋보이는 조연이었고, 그 영화의 주연이었던 조승우와 강동원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터프함, 천진난만함)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도둑들'에서는 캐릭터 올스타전이라 할 만큼 등장인물들(김윤석, 이정재, 김혜수, 전지현, 김수현, 김해숙, 오달수, 임달화)의 매력이 시종일관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개인적으로 이번 '암살'에서 가장 매력 있던 캐릭터는 하정우가 맡은 '하와이 피스톨'이었다. 배역의 이름에서 느껴지듯 무자비한 킬러인 듯싶으면서도 낭만과 로망을 간직한 '하와이 피스톨'은 극 중에서 가장 큰 내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 '베를린'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하정우와 전지현은 이번 작품에서는 '베를린'보다 더 애절한 사연과 잠깐이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울 로맨스를 보여준다. '하와이 피스톨'을 늘 옆에서 지켜주는 영감 역할의 오달수도 특유의 유머코드를 전달함과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 '하와이 피스톨'을 지켜주는 의리의 캐릭터로 짜릿한 쾌감을 전달한다.

염석진 역할을 맡은 이정재는 이번 작품을 위해 무려 15kg나 감량하는 열성을 보이면서 임했는데, '도둑들' 이후 '신세계', '관상'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그의 농익어가는 연기력을 맛보게 한다. 염석진 캐릭터는 어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 삶에 유쾌하지 못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안옥윤(전지현)과 함께 독립군 암살단에 합류하는 속사포 역을 맡은 조진웅과 황덕삼 역의 최덕문(영화 '도둑들'에서 김수현에 애정을 느끼는 레즈비언 호텔 지배인으로 등장해 얼굴을 알린 바 있다)은 영화 속의 유머를 전담하는 감초 역할로서 자칫 무겁고 지리한 흐름으로 흘러갈 수 있는 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몰입하다 보면 2시간 39분의 러닝타임이 어느 새 훌쩍 흘러간다. 영화의 결말은 현실적으로 따지면 노년이 된 염석진의 재판이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관객들에게 페이소스를 제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페이소스를 통해 '암살'은 공들여 다듬어진 블록버스터로서 소임을 다한다.

‘암살’은 영화적 재미로도 손색이 없으며,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암울한 역사와 여전히 지속되는 현실(친일파 잔재)을 세련된 방식으로 일깨워준다. 역사적 현실에 고민 없이 즐기고 싶다 해도 무리가 없다. 영화적 재미로만 볼 때, 영화 '암살'은 전지현을 위한 느와르이며, 하정우는 무얼 해도 다 잘하는 배우임을 입증한다. 이정재의 멋은 더욱 농후해졌다. 조진웅, 오달수, 최덕문 등 깨알조연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시대의 타고난 이야기꾼 최동훈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올라갔으며, 앞으로 최동훈의 차기작은 어떤 형태로 나오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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