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net 힙합 서바이벌 프로 ‘쇼미더머니 4’에 출연 중인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위너’의 멤버 송민호가 지난 10일에 방송된 3차 오디션 무대에서 “'MINO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랩 구절을 뱉었다 논란이 되고 있다. 즉각 여성비하라는 비난이 폭발했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그 와중에 인상적인 것은 “여성비하라고 한들 문제 될 게 없다”는 강경한 반론이다. 힙합은 원래 여성혐오 장르다 또는 원래 마초 장르다, 라고 힙합의 본토 미국의 전통을 끌어와서 방어하는 원리주의다. 힙합 장르 팬들, 인터넷 힙합 커뮤니티가 저 주장의 진원지인 것 같다.

 

만약에 혐오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힙합은 원래 그렇다는 반론이 의미가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그것은 원래 잘못된 점이 있으니까 잘못이라고 비판하지 말고 놔둬라"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다만, 저 말이 의도하는 바가 뭔지는 캐치하겠다. "예술은 사람 사는 다양한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예술이 올바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예술과 현실은 분리돼있다. 장르 문화는 자신의 매력을 표현하는 자신 만의 전통을 갖고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으로 음악을 억압하지 마라." 정도로 정리한다면 훨씬 논리적인 주장이다.

 

장르의 전통이란 말은 장르의 관습(convention)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장르는 각 분과 예술에 속한 하위 양식인데, 각각의 예술이 생긴 이래 각각의 장르가 파생되었고 확립과 재변형을 거쳐 특질을 이어왔다. 장르의 관습은 온전히 창작자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바깥 향유자의 인식과 상호작용하며 창작자에게 반영된다. 힙합이란 음악을 떠올린다고 할 때, 90년대엔 네 박자 ‘먹통 비트’를 샘플러로 찍은 RAW한 사운드였다면, 2015년에는 BPM을 느리게 맞추고 신시사이저로 편곡한 트랩 비트다. 이렇듯, 장르는 원래부터 저 홀로 있던 것도 아니요, 고정불변의 무엇도 아니다. 자신의 전통을 지키려 하는 동시에 자신의 전통을 갱신하려 하는 것이 장르의 존재방식이다.

마초 성향, 또는 여성혐오 성향은 힙합이란 장르의 컨벤션이 맞다. 이 점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여성혐오란 여성을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성적 객체로 간주하며 멸시하는 정서와 태도, 제도를 말한다. 'BITCH'(여성을 멸시하는 욕설)란 슬랭을 입에 달고 살며 그 말로써 "나쁜 것, 천한 것, 약한 것"을 일컫는 음악에 - BITCH는 꼭 여자를 가리킬 때만 쓰는 낱말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여자를 가리키지 않는 경우라도 BITCH란 표현 자체가 여성혐오라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 또는 음반을 팔아서 이룬 성공의 전리품으로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 수를 과시하는 음악에 어떻게 여성 혐오적 태도가 없을까.

윤리로부터 멀어질 예술의 자유

예술에서 윤리를 일탈한 표현방식이 용납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꼽을 수 있다. 1) 현실적으로 크고 작은 모든 일탈적 표현을 규제하기는 힘들다. 2) 그러므로 일탈을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표현 수위와 맥락이 중요하다. (가령 여성혐오를 고찰할 목적으로 여성혐오 가사를 패러디한다면 전혀 문제가 아니다) 3) 오래 쓰인 익숙한 표현은 클리셰다, 즉 창작자와 향유자는 그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표현에서 의미를 떠올리지 않는다. 하나의 '약호'로 인식한다. 4) 예술의 매력은 해방감이며, 예술은 곧 현실이 아니다. 우리에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나쁜 것을 즐길 자유가 있다.

나는 이런 조건이 지켜지는 한에서 예술이 윤리적으로 불온한 것을 다룰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역이든 비윤리적인 것을 멸종시키기는 어렵고, 그런 살균의 집념은 예술의 잎맥을 말려 죽일지 모른다. "힙합은 RAW한 정서가 매력인데 이거저거 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게 뭔 힙합이냐" 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힙합에서 '여성혐오'는 허용될 수 있을까? 의미가 비어있는 클리셰로 쓰이는 낮은 수위의 표현, 맥락상 멸시의 의도가 없는 표현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본다. 힙합 레이블 일리네어 레코드는 ‘스웨거’ 가사(뽐내는 가사)로 유명한데, 그들의 스웨거엔 항상 "돈과 여자"가 따라붙는다. 현실에 공공연히 저런 말로 으스대는 사람이 있다면 천박하고 무식한 인간이라 따돌림 당하겠지만, 일리네어의 노래를 듣는 여성들이 그리 수치심을 느낄 것 같진 않다. 저런 가사는 관용어일뿐더러 그 효과가 누군가를 비하하는 것보다 자신을 어필하는데 쏠려있기 때문이란 짐작도 든다. ‘BITCH’란 표현도 얼마간 유보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저 말이 '가사'라기보다 거친 정서를 구현하는 '사운드'처럼 들릴 때가 있다.

이만큼 힙합이 메인스트림에 정착했는데도 저 표현들이 아직 산부인과 운운처럼 항의에 부닥친 적이 없다는 사실도 환기해야 한다. (저런 표현들 자체, 또는 저 클리셰들이 총체적으로 조성하는 태도가 여성혐오를 암암리에 만연시킨다는 비판은 할 수 있다. 단, 나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만약 저런 클리셰에 문제를 느끼는 여성 MC가 있다면 성별을 바꾸어서 표현 방식을 전유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본다. 여기서 여성혐오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대상화된 채 묘사되어서 문제인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 3월 종영된 MNET '언프리티 랩스타‘ 경연곡 "MY TYPE"에서 치타가 쓴 '~새끼' 라임은 여성 MC용 'BITCH'를 발명한 것이다.

힙합은 원래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권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도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표현이 있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유럽 축구장에서 인종차별 보디랭귀지를 한 선수와 관중은 중징계를 받는다. 2014년 한 영국 대학생은 콩고 출신 축구 선수가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지자 ‘유색인(wogs)들아 가서 목화 좀 따오시지’라는 말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체포당했다. 2007년, 명품 패션 브랜드 ‘돌체 앤 가바나’는 집단 성폭행을 연상시키는 광고 사진을 배포했다가 유럽적 비난에 직면했다. 2014년, 영국의 코미디언 다니엘 오릴리는 공연 중 여성 관객에게 “강간당하고 싶냐”는 멘트를 던졌다 자신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의 새 시즌 방영 계획을 취소당했다.

일탈과 자유는 예술의 자원이지만 현실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 힙합 또한 예술의 하나이지 예술 위에 있는 예술이 아니기에 이 논리에서 면책받을 이유가 없다. 이번 사건에 관해 흑인 음악 웹진 ‘리드머’에 올라온 글은 경청할만하다. (“‘쇼미더머니’ 여성비하 랩 가사 논란, 왜 문제시해야 하는가”) 저 글은 힙합의 ‘본토’ 미국에서 질타당한 여성혐오 표현을 정리하고, ‘본토 힙합’의 입지전적 인물 스눕 독이 젊은 날의 여성혐오 가사를 반성한다고 고백한 일화를 전한다.

나는 힙합의 '여성혐오'가 어떤 조건을 벗어난다면 문제가 될 개연성이 있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 조건에서 많이 벗어날수록 그 개연성도 커진다. 나와 다른 정체성에 대한 비하를 다른 RAW한 표현과 나란히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 정확한 경계는 어디쯤일까. 그곳은 사건과 논란을 거쳐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행사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체성에 대한 혐오 표현 때문에 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껴서 반발한다면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고려 사항이다.

말했듯이, 장르의 전통은 영구불변의 교리가 아니다. 힙합은 원래 이렇다는 말은 이 맥락에선 더 이상 유효한 논거가 아니다. 경계 찾기를 방해하는 몸짓일 따름이다. 어떤 장르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규정짓는 코어가 있어서 그것을 빼고 나면 더 이상 그 장르가 아닌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힙합에서 그 코어가 설령 ‘라임’일 수는 있어도 '여성혐오'일 리는 없다.

윤광은 _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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