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 문제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5일 실시된 유로그룹회의에서 제시한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투표에 참여한 그리스 국민의 약 61%가 반대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집권 급진좌파연합(시리자) 내각은 국제채권단과 추가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그러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채권단의 태도가 완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제 관심은 7일 열리는 유로존 정상회의와 8일 유로그룹 회의에서 재협상과 관련 어떤 결론이 나올 것인지에 쏠리고 있다.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파리 엘리제궁에서 긴급 회동을 하기로 했다. 유로존의 사실상 1, 2위 국가 수장들이 회동을 하는 것이니만큼 이 자리에서의 결론이 7~8일 일정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과 마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 등은 추가 협상에 대한 원론적 반응과 함께 ‘그렉시트(Grexit)’를 염두에 둔 발언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는 점도 이후 사태 예측의 주요한 실마리다. 반면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정부 관계자들은 ‘하나의 유럽’을 유지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고 있다.

특히 에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경제장관은 ‘베르사유 조약’까지 언급하며 “정치적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사회가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비준한 것으로 독일에 연합국 손해에 대한 막대한 배상지불 부과와 영토 삭감 및 군비축소 등을 강요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경제적 고통은 이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가 성장하는 토양이 됐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즉, 프랑스 경제장관의 발언은 채권단과 그리스 정부가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할 경우 새로운 정정불안으로 이어져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일만 하다.

실질적인 유로존의 수장인 독일은 그동안의 협상 과정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독일의 전통이나 다름없는 보수적 재정정책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일각에서는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실각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게 사실이다. ‘레짐 체인지’를 통해 협상파트너를 교체해 채권단의 입장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계획에 따른 전술이 아니겠냐는 해석이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의 사례는 이런 전술 역시 모험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그리스 국민투표 국면에서 집권 시리자당과 함께 ‘반대’ 투표 입장을 밝힌 주요 정치세력으로는 황금새벽당이 있다. 황금새벽당은 ‘네오나치즘’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극우정당인데, 지난 1월 총선에서 약 6%의 지지를 확보한 바 있다. 유럽 극우정당들이 ‘유럽연합 탈퇴’를 공약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과 유로그룹의 구제금융안에 대해 압도적 반대의사를 표한 국민투표 결과를 고려하면 협상 최종 실패로 치프라스 총리가 실각할 경우 황금새벽당이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마저 점칠 수 있다. 유로존 소속 국가에서 테러와 살인까지 감행하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는 사례가 생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렉시트’ 역시 현실화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리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연설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경제적 위기로 인한 그리스의 정치적 혼란은 이미 현실화된 상태다. 특히 그리스 정부가 뱅크런을 막기 위해 자국 은행들에 대한 영업 중단 및 자본통제 조치를 감행한 이후 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러한 조치가 명백한 위기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국민투표 이후 정국에서 빠른 시간 안에 은행 영업 재개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본격적으로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그리스 은행들의 영업 재개를 위해 유럽중앙은행(ECB)에 자국 은행들에 대한 긴급유동성지원(ELA) 대출한도 증액을 요청하고 있다. ECB는 채권단과 그리스 정부의 협상이 결렬된 직후 ELA 대출한도를 동결시켰다. ECB가 ELA 대출한도를 증액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 정부는 20일 만기가 도래하는 ECB에 대한 35억 유로의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된다. 결국 실질적 ‘국가부도’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그렉시트’가 현실화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온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 입장에서는 차라리 유로존 탈퇴가 답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와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등이 이와 같은 주장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현재 그리스 위기를 ‘트로이카(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가 현실에 맞지 않는 긴축 프로그램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로그룹의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일 경우 경제적 고통이 심화될 뿐이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유로존 탈퇴론자들은 드라크마화를 부활시켜 최소한의 환율통제권을 손에 넣는다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사태 수습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만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의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없고 관광업 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환율 통제를 통한 기대 이익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드라크마화를 재도입할 경우 통화가치 하락과 공급과잉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돼 인플레이션 발생을 피할 수 없게 돼 치명적인 결과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 역시 이러한 점을 인식해 “유로화 도입 이후 조폐기를 부셔버렸기 때문에 드라크마화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를 선택할 경우 유로존의 또다른 ‘문제 국가’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위기가 ‘전염’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문제다. 그리스의 사례가 재발할 수 있다는 인식이 국제적 차원에서 확산될 경우 앞서 국가들의 자금조달비용 증가의 원인이 될 수 있어 새로운 경제적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유럽연합이 어찌됐건 ‘하나의 유럽’이라는 가치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통화동맹에 의한 이익 추구를 넘어서 고통을 분담하는 명확한 합의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 또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 위기는 독일을 정점으로 한 유럽의 통화동맹이 결국 ‘빈익빈 부익부’의 결과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위기를 통해 유럽 좌파세력의 무기력함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는 흐름도 있다. 그리스 시리자 정권과 스페인의 포데모스 등은 세계적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불안과 이를 성공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는 유로존의 고질적 문제 때문에 ‘1000유로 세대’ 등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에서 유럽의 새로운 좌파적 흐름이 드러난 것으로 많은 기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유럽의 기성 좌파세력은 이들과 유의미한 접점을 찾지 못한채 분절화된 상태로 이번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기민-기사연합과 대연정을 이루고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시리자 정권을 맹비난하고 있다는 점은 유럽이 처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오히려 별다른 경제적 연관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리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라는 점에서 안보적 관점으로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미국 오바마 정권의 입장이 유로존의 미래에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유럽이 유럽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의 단초가 이후 며칠 사이에 과연 발견될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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