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예술가가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한 명은 연극배우였으며, 5일 동안 그가 죽었는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쓸쓸하게 홀로 ‘무연사(無緣死)’한 것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영화배우였으며, 자신의 차 안에서 타다 담은 번개탄과 함께, 마찬가지로 쓸쓸하게 숨진 채 발견되었다. 우리는 다시금 이 잔혹한 사회 속에 위치한 ‘예술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디어이론가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예술가는 새로운 미디어나 테크놀로지, 또는 사회적 환경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각능력을 바탕으로 사회 속에서 조기경보체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현재의 사회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적으로 가장 예민한 존재들인 예술가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마치 침몰해가는 잠수함 속에 있는 토끼의 산소부족으로 인한 죽음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죽음이 던지는 허망함의 무게감이 상당한 이유는, 그 죽음이 우리 사회의 절망적 상황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절망이 더욱 심화되어 끝도 없는 어두운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더없이 안타까운 방식으로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들이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원되어버리는 이 사회에서 경제적 쓸모가 없는 예술가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칸트가 말했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순수 예술의 정의는 이제 공허한 수사에 그치게 되었으며, 오로지 경제적 교환가치를 획득한 예술만이 경쟁에서 승리하여 그나마 생존의 가느다란 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는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기-경영자가 되어야 하며, 결국 자신의 작품을 ‘투자’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한 뒤 지원금을 받아 미약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고 김운하 님과 판영진 님의 모습

이제 예술가로써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즉 죽음을 무릅쓰고 예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예술이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장이 되었는가. 각자도생의 사회, 생존이 최우선의 가치로 자리 잡은 현재 사회의 살벌한 지형에서, 예술은 더 이상 자율성을 보장 받은 ‘아방가르드’적 영역에서 자신의 안위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작품 전시를 둘러싼 모든 과정에서 작가는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각종 전시성 행사에서 등 떠밀려 초대된 예술가는 현실의 초라함에 스스로를 소모시키며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적 삶에 회의를 느껴야 한다. 모 예능 프로그램의 스태프 80여 명 중 정규직은 단 6명에 불과하다고 전해진다. 영화 현장은 꿈을 담보로 한 착취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매우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스태프들은 ‘입봉’이라는 밝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착취구조 속으로 내다바치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각종 공공기관들은 예술가를 위한 수많은 지원 사업을 만들고 스스로의 실적을 쌓으려 하는데,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예민한 ‘촉’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촉’을 가진 예술가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다. 돈으로 교환할 수 없는, 즉 상품성 없는 ‘촉’을 가진 예술가는 도무지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낮밤 가리지 않으며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코 원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다. 이를 온 몸으로 거부한다면, ‘순수’한 예술가로써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마음먹는다면, 그 예술가는 바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예외 역시 어느 정도의 물질적·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어있는 예술가에게 주로 허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영역도,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양극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적 죽음을 사전에 방지하며 예술가들의 사회적 안전망이 되어야 했던 예술인복지법은 또 다른 비극적 죽음들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각종 기준을 앞세우며 이를 충족시키는 예술가들에게만 열려 있는 예술인복지법의 각종 제도들은 그 탄생과정부터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예술인복지법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포기하는 ‘국가’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공동체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개인과 가족뿐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수사 앞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안전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도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예술가가 처한 냉정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예술가들마저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는 것에 적응하게 되면 앞으로 우리는 실제로 더 많은 비극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월호를 통해 얻은 교훈 중 하나인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저항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몫이며, 이는 두 예술가의 죽음에도 공히 해당되는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글은 문화연대 웹진 <문화빵>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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