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결정적인 한 방’에 관객은 열광하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을 무대나 스크린에 옮기더라도 임팩트 있는 연출이냐 아니냐에 따라 때깔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뮤지컬 같은 경우에는 누가 연출을 맡느냐에 따라 같은 텍스트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을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한 방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영화가 감칠맛이 나느냐, 아니면 객석에서 일어난 후 긴 한숨밖에 안 나오냐 하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임수정과 유연석의 <은밀한 유혹>은 ‘결정적 한 방’이 없다. 임수정이 연기하는 지연의 상황은 사면초가 그 자체다. 믿었던 친구는 지연을 배신하고 지연에게 모든 빚을 떠맡기고 도망쳤다.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친구가 자신에게 떠맡긴 부채를 감당할 수 없다. 지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못하면 사채업자의 의지대로 빚을 갚아야 할 처지다.

하지만 지연은 채무를 갚는 것보다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인 여자처럼 보인다. 카지노 회장(이경영 분)이 돈으로 지연을 포획하려 하나 회장의 돈이라는 낚싯바늘에 걸리지 않는 까닭이 지연의 배후에 있는 성열(유연석 분)의 가르침 덕이라고 쳐도, 회장의 괴팍함에 화가 치민 나머지 더 이상 회장을 모시지 못하겠다고 성열에게 말할 때에는 지연이 떠안고 있는 빚의 규모를 스스로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철없는 하소연으로만 들린다.

즉,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자존심을 억눌러가면서 회장과의 현실적인 타협을 시도했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연의 영화 속 제스처는 빚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우선순위의 잘못된 판단을 지연이 고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일 지연이 계속 자존심만 고수했다면 아마 그는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서 신세를 망쳤을 가능성이 높다. 지연의 이러한 태도는, 사채업자에게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인생의 위기가 알량한 자존심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판단 미스와 연관된다.

지연이 성열을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썸’ 타는 태도도 이 영화를 어정쩡하게 만든다. 지연과 성열은 엄연히 비즈니스 관계다. 만일 지연이 성열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바다에 빠진 지연의 모자를 찾아주기 위해 바닷물로 용감하게 뛰어든 성열의 태도 때문이라고 한다면, 영화는 너무도 안일하게 판단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는 유연석의 어깨근육을 강조점으로 보여줌으로 성열의 육체적인 매력이 지연에게 보다 어필하고 있음을, 즉 기사도 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육체미가 지연의 감정을 사로잡고 있음을 강조함으로 성열의 외모에 지연이 빠져든다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안일하게 흘러가는 캐릭터 설정 때문에 영화 후반부의 반전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 자리할 곳은 사라진다. 그리고는 영화 후반부에 나타나는 서스펜스와 반전 모두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리고야 만다. <은밀한 유혹>은 결정적인 한 방은 고사하고 캐릭터 구축에도 철저하게 실패한 영화인 것 같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