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결정적인 한 방’에 관객은 열광하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을 무대나 스크린에 옮기더라도 임팩트 있는 연출이냐 아니냐에 따라 때깔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뮤지컬 같은 경우에는 누가 연출을 맡느냐에 따라 같은 텍스트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을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익히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결정적인 한 방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영화가 감칠맛이 나느냐, 아니면 객석에서 일어난 후 긴 한숨밖에 안 나오냐 하는 차이가 생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임수정과 유연석의 <은밀한 유혹>은 ‘결정적 한 방’이 없다. 임수정이 연기하는 지연의 상황은 사면초가 그 자체다. 믿었던 친구는 지연을 배신하고 지연에게 모든 빚을 떠맡기고 도망쳤다.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친구가 자신에게 떠맡긴 부채를 감당할 수 없다. 지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못하면 사채업자의 의지대로 빚을 갚아야 할 처지다.
즉,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자존심을 억눌러가면서 회장과의 현실적인 타협을 시도했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연의 영화 속 제스처는 빚보다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우선순위의 잘못된 판단을 지연이 고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일 지연이 계속 자존심만 고수했다면 아마 그는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서 신세를 망쳤을 가능성이 높다. 지연의 이러한 태도는, 사채업자에게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인생의 위기가 알량한 자존심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판단 미스와 연관된다.
안일하게 흘러가는 캐릭터 설정 때문에 영화 후반부의 반전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 자리할 곳은 사라진다. 그리고는 영화 후반부에 나타나는 서스펜스와 반전 모두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버리고야 만다. <은밀한 유혹>은 결정적인 한 방은 고사하고 캐릭터 구축에도 철저하게 실패한 영화인 것 같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