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다큐 <백년전쟁>를 방영한 시민방송 RTV에 대한 정부의 중징계가 정당하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오히려 ‘법원’이 편향적인 역사관을 가졌다는 역비판도 제기됐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5·16쿠데타’를 ‘5·16혁명’으로 서술하는 등 남다른(!) 역사관을 보였다. (▷관련기사 : 법원, ‘백년전쟁’ 중징계 정당 판결...5·16 ‘혁명’으로 기재)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3일 법학·역사학계 교수 및 연구자들 180여명이 역사다큐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편과 ‘프레이저 보고서 제1부’를 방영한 “RTV에 대한 중징계를 취소해 달라”는 의견서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역사학계는 <백년전쟁>이 “학계의 통설을 다큐화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법학계는 “정부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유포를 금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제한”이라는 입장이다.

역사학계 “백년전쟁, 학계의 통설을 다큐멘터리로 정리한 것일 뿐”

역사학 교수 및 연구자들은 ‘<백년전쟁> 방영 시민방송(RTV) 징계조치에 대한 역사학계 의견서’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역사 연구는 전문 연구자들만의 영역으로 국한된 면이 많다”며 “이런 점에서 <백년전쟁>에서 시도한 방식은 잘 알려지지 않은, 또는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일반 시민들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좋은 접근 방법”이란 의견을 밝혔다.

역사학계는 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선 중요한 인물이기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을 거점으로 외교노선 중심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던 시기,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론을 제시해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던 것도 상식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을 지냈지만 “독재적 국정 운영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의 힘에 밀려난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며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미화·찬양의 움직임을 우려했다.

역사학계는 역사다큐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편에 대해 “이승만의 학위 문제, 하와이 행적, 독립운동 인식 등 일반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소재로 삼아 이승만을 미화·찬양하려는 움직임을 경고하려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역사다큐 <백년전쟁> ‘프레이저보고서 제1부’ 편에 대해서도 “박정희 정권의 초기 경제정책은 혼선과 미숙함이 많았고 박 전 대통령 또한 이를 인정했다”며 “그리고 초기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은 이미 제2공화국에서 준비한 경제개발계획안과 미국 케네디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정책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프레이저보고서’는 이런 상식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계의 통설을 프레이저보고서라는 잘 알려지지 않는 소재를 이용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학계 교수 및 연구자들은 “논문 등을 통해 통상 이야기되는 내용들이 왜 법정다툼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게다가 다큐멘터리의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그래서 <백년전쟁>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을 보면서 특정한 정치적 흐름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편견이 개입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역사다큐멘터리는 하나의 정설을 심도 있게 구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숨겨진 이면사의 발굴을 통해, 또는 주류에 대한 비주류의 견해를, 심하게는 정설에 대한 부정까지 다양한 영역을 다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학계 “기득권층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금지해선 안돼”

법학 교수 및 연구자들은 ‘<백년전쟁> 징계조치에 대한 법학계 의견서’를 통해 “<백년전쟁>은 한국현대사를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로서 매우 잘 구성된 작품”이라며 “백년전쟁은 다큐멘터리로서 궤도를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튼실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기득권질서에 대한 비판인 경우에 특별히 주목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학 교수 및 연구자들은 ‘1심판결’에 대해 “사실에 기초해 구성된 작품을 막연히 편향적이라거나 불공정하다거나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며 “어쩌면 1심재판부는 <백년전쟁>이 묘사하지 않거나 강조하지 않는 부분과 관련해 선입견을 가지고 그러한 판단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법학계 교수 및 연구자들은 “<백년전쟁>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추론·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며 “또한 이 작품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두 분의 이미지가 실추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징계를 받아야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현재의 정부당국은 마치 자신의 보수적 역사관에 맞지 않은 견해를 제거하려는 18세기 프로이센 국가감독교회와 같다”며 역사다큐 <백년전쟁>에 대한 논란을 비판했다. 이어, “이러한 태도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언론정책으로 오히려 전직 대통령의 치욕스러운 행동들을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진정으로 가치 있는 정치인상과 정치적 세계의 객관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법학계 교수 및 연구자들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단순히 개인이 아니며 정치인으로서 평가받는 것을 어떠한 면에서도 피할 수 없다”면서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이유로 비판자들에게 지배적인 입장을 억지로 수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역사다큐 <백년전쟁>은 이에 비춰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의 대부나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초상이 온당한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의 완성자라는 평가가 합당한지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검토해 어두운 과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학계 교수 및 연구자들은 “<백년전쟁>은 편향과 우상화로 치닫고 있는 두 인물에 대한 정부당국의 평가에 균형을 잡아준다는 의미에서 훌륭한 다큐멘터리”라면서 “비판적인 다큐멘터리에 검열당국이 원하는 수준의 반대의견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감독의 자율권과 방송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오로지 허위사실에 입각한 날조라면 제재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그렇지만 <백년전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합리적이고 예리한 비판이다. <백년전쟁>이 집권정부와 기득권층에게 불편한 진실(허위사실이 아닌)을 유포한다고 해서 금지한다면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앞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며 ‘관계자징계 및 경고’ 제재를 의결한 바 있다. ‘편향된 역사관’으로 논란을 빚었던 KBS 이인호 이사장의 문제제기에서 시작된 중징계였는데, 1심 재판부는 방통심의위의 제재사유를 그대로 인용해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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