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구라카즈 시게루, 한태준 옮김, 갈무리, 2015.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없다. 내동댕이쳐진 삶 그리고 생존을 위협하는 지옥도는 무한맵으로 펼쳐져 있고 지뢰와 바리케이드는 ‘각개격파’해 나가야 겨우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멈추지 않는 재난의 심연을 마주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이러한 상황을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다. 재난 앞에서 무력함의 아가리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시스템이 말해주는 것은, 사실 이 시스템은 애시당초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재난을 마주한다. 당장 다음 달의 재고용을 보장받을 수 없는 고용불안, 빈곤의 심화, 혐오와 증오의 증대처럼 일상의 모든 것들이 재난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살얼음 위를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도 우리의 발밑은 날카롭게 베이고 그 피를 마시며 시스템이 증식되어왔음을 보게 된다. 시스템은 안전보장의 장치로 지배와 통치를 이루어내는 게 아니라, 무능과 방치를 통해서 시스템의 능력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완해야 할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통해서 지배를 지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사정이 다만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적인 조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도 그러하다. 신자유주의라는 초국가적인 상태 하에서 “개인은 조직 외부에 매달”린 채로, 끝없이 창조적이고 자유롭게 ‘자기계발’할 것을 강요받는다. 조직/공동체가 더 이상 개인의 안정된 삶을 더 이상 책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3.11이라는 재난 앞에서 그 무능은 더욱 사정없이 드러났다. 우리는 3.11 이후 이른 바 국민들이 시스템에 의해 내팽개쳐지는 것을 목도하였다. 마치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동경의 공원에서 내팽개쳐진 사람들이 노숙을 시작했고 곧 대도심에서 지워지듯 이들을 구제하는 각종 장치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곧 사라질 것이다. 혹은 모욕주기를 통해서 침묵이 지속되거나 말이다. 이렇게 재난을 마주하여 자신을 보호할 보호고치도 없이 그저 내팽개쳐진 수밖에 없는 개인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모두가 내팽개쳐진 상황에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의 저자는 ‘미적 아나키즘’을 발굴해낸다. 먼저 ‘관동대지진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예술 운동과 공동체’라는 부제에 주목하자. 이 책의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관동대지진이 보여준 재난의 심연은 단지 ‘자연재해’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동대지진 직후 군대와 자경단이 아나키스트와 노동운동가를 살해하고, 조선인·중국인을 학살했던 것이야말로 재난이 드러낸 시스템의 어둠이었다. 저자는 이 역사적 상황으로 돌아가 재난 앞에서의 예술과 주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짚고자 한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것임이 드러나는 지점, 재난 이후 우리는 단지 우연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라는 지점, 이제는 그 무엇도 개인의 삶의 의미를 담보하지 못하는 지점이라는 세 꼭짓점을 통해 저자는 “우리는 모두 아나키즘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13)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우리를 1923년부터 1937년까지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단지 그 시간이 재난을 당한 때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는 재난 이후에 내팽개쳐진 생명을 어떻게 다시 가치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미적 아나키즘을 다시 캐내는 것은 그처럼 우연적인 것으로 세계에 내던져진 ‘나’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다이쇼에서 쇼와 초기에 걸쳐서, 그동안 아무 것도 아니었던 개인의 ‘생명’이 지닌 창조성을 최대한으로 강조하는 예술상이 존재했다. 그 사상은 고독하지만 독자적인 개인, 무한히 산출되고 있는 개인이라는 모델을 내세웠다. 그것은 ‘나’라는 단독적인 생명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에 가까웠고, ‘나’는 세계의 일부인 것만이 아니라, ‘나’야말로 세계를 창조한다는 생각이었다는 점에서 유아론적이었다. (11)

미적 아나키즘은 보호막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개인을 다시 공동체로 환수하는 것에 앞서 ‘나’의 의미를 세우고자 한다. 그 어떤 공동체에 대한 이론보다도 먼저 ‘나’의 생명(삶)을 긍정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 것, 그것은 저자가 말하는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을 발견하는 것인 동시에 ‘능산적 자연’의 힘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그처럼 “오히려 부단한 전개와 표출, 새로운 자기의 획득, 끝이 없는 변화이자 결국엔 미적인ㅡ세계를 창출함과 동시에 새로운 ‘나 자신’을 만들고, 표현한다는 의미에서ㅡ창조하는 주체 구성의 원리인 것이다.” (15) 그렇다면 미적 아나키즘이 발견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신자유주의적 시스템 하에서 끊임없이 자유롭게 창조적이기를 강요받는 것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말로 유효한 것이 된다. ‘예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국가 공동체에 포섭되는 위험을 계속하여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건축, 고현학, 독실, 민예, 영화, 동화 등을 만화경처럼 펼치며 주유한다. 이 궤적은 단지 미적 아나키즘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미적 아나키즘이 위태롭게 시스템에서 비껴나가는가의 ‘위태함’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일본은 다이쇼 시기에 접어들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생활 개선 운동 등을 통해 ‘일상의 행위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규범에 따라 분절화하고 조직’(46)하고자 하며, 도시 또한 단순히 상부로부터의 통제를 넘어서 삶 전반을 분절하고 배치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그 자체로 구성된다. 그러나 관동대지진 이후, 그러한 배치와 효율이 무너진 자리에 ‘부락’이 들어선다. 피난민들이 마구잡이로 지어 올리는 부락은 단지 비바람을 피하는 임시가옥이 아니라, 분절된 배치를 넘어서 자신의 취향과 기지와 의지와 자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이 ‘부락’을 둘러싼 다키자와 마유미와 곤 와지로의 논쟁은 흥미롭다. 둘 다 효율을 앞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자아 그 자체의 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키자와는 건축가로서의 자아의 발현을 드러내는 것이 ‘미’라고 하는 것에 비해 곤 와지로는 피난민들이 발현하는 자아와 욕구를 그 자체로 긍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락 장식사>를 만들어 피난민들의 부락을 장식해주었던 곤 와지로에게 이처럼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단지 ‘나’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관여되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곤 와지로가 고현학을 통하여 예측불가능한 삶의 흐름 속에서 통계와 숫자를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수집을 통해 단지 ‘흐름/리듬’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의 한 편에는 ‘독실’이 존재한다. 곤 와지로가 효율/분절/배치에 맞서 예측불가능한 리듬을 살리고자 했던 것처럼 ‘집’의 내부에서도 위생/실용/분절의 힘은 오히려 ‘독실’이라는 예측불가능한 밀실을 낳았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수많은 통계, 선거, 조사 등을 통하여 모두를 하나라는 숫자로 열거하는 동안 다이쇼 시기의 작가들은 밀실 속에서 오히려 열거되지 않는 무한한 신체와 욕망의 차원이라는 다른 ‘리얼’을 발견해낸다.

그러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이 자연의 산출력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여 단지 삶의 흐름 속에 흩어져버리는 것이거나 반대로 밀실 속에서만 존재가능한 고립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끌어와 ‘자연의 산출력’을 근거로 삼는 것이 어떠한 양면적 성격을 띠는지를 짚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익명의 집합적 주체들인 민중들이 만들어내어 일상 속에 녹아들어간 ‘민예품’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자연의 능산성)이 나타나는 실천적인 예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근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결국은 근대 미학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한 편으로 ‘인간’을 덧없는 것으로 지워버리는 위험을 갖고 있음을 짚는다.

이처럼 저자는 재난을 마주한 신자유주의적 주체ㅡ늘 창의적이고 새롭게 자신을 ‘알아서’ 갱신하라ㅡ의 다른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미적 아나키즘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간단히 ‘대안’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이 가능성이자 동시에 위태로움임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6장 ‘혈통의 생성’이다. 무수한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의 주관을 미적 경험으로서 전달하며 역사를 소거했던 야스다 요주로는 결국 신화적 혈통에 자신의 주체성을 의탁하며 국수주의로 급격히 경사된다. 저자는 야스다 요주로를 끌어와 다시, 미적 아나키즘과 파시즘의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를 벌려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가능성은 지금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하위문화에서 어떻게 ‘자연’의 능산성을 캐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재난에 마주해 우연적으로 남겨진 삶에서 의미를 캐어낼 것인가. 우리의 ‘자연적 능산성’은 지금 어디에서 출현하고 있는가. 자연적으로 분출된 ‘나’들의 힘은 어떻게 시스템이 아닌, ‘자기 통치’로서의 삶의 예술이자 ‘아나키’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책이 미처 다 답하지 못한 부분들을 우리는 내일의 삶을 직조해나가며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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