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날을 알고 있고, 이 날의 유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를 통해 배운 어린이날이란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어린이를 사랑하는 방정환이란 이름의 청년이 색동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기념행사를 열었으며, 그 날이 오늘까지 이어져 국가행사로 정착되었다는. 물론 이 설명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지나치게 신화적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제1회 어린이날은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에 열렸다. 이 날을 위해 선전포스터 4,000장과 전단지(삐라) 24만장이 전국 소년단체 130여 곳으로 보내졌다. 서울에서 열린 어린이날 기념식에는 1000여명의 인원이 참가했고, 자동차 세대가 가두행진을 위해 동원되었다. 오늘날까지 유력 일간지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날의 행사를 홍보하고 지원했다. 행사 실무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이 일을 치러내는 과정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당시만 해도 옥외집회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심했던 관계로, 집회신고에도 상당한 애를 먹었다.

색동회의 멤버는 당시 8명에 불과했으며, 모두 일본 유학생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다. 8명의 일본 유학생들에게는 불가능한 규모의 일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하면 이야기는 더 혼란에 빠진다. 색동회의 창립은 1923년 5월 1일에 이루어졌다.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주최하고 치러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 모든 일을 당일치기로 해낸 셈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 보자. 실은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은 두 번 치루어졌다. 1923년의 “제1회 어린이날”은 그 중 두 번째로, 첫 번째 “제1회 어린이날”은 1922년에 열렸다. 1922년과 1923년의 사이에 시공간의 괴리가 일어났던 것일까? 아니면 색동회는 실은 이능력을 가진 청년들의 모임이었고, 방정환에게는 시공간 왜곡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멀쩡한 역사가 신화적인 색채를 띄게 된 것은, 그 일이 이루어진 과정과 배경이 생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린이날과 방정환에 대한 글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의 사상적 배경과 위치, 어린이날이 치뤄지고 이어질 수 있었던 조직적 역사적 배경, 그리고 세 개의 어린이날과 그것들의 흥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 정의화 국회의장이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서울 여의도의 한 금융권 어린이집을 방문해 어린이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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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의 1923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짚어야 할 연표가 있다. 하나는 1917년이고, 하나는 1919년이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두 사건은 한동안 진영을 막론하고 조선의 ‘운동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당시의 운동권은 “민족주의 진영/사회주의 진영”으로 구분되었는데, 방정환이 속한 천도교 계열 정치운동은 굳이 따지자면 민족주의 계열에 가까웠다. 아주 아주 엄밀히 따지자면 사해동포주의와 무산계급운동과 민족주의가 복잡하게 밀당하는 상태에 가까웠고 신구파의 갈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넘어가자. 당시 방정환은 지하조직인 ‘경성청년구락부’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천도교 청년회(천도교 신파로 구분된다) - 천도교 청년당으로 이어지는 청년 정치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역사적으로 유명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하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제일 먼저 떠올리겠지만, 3.1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서나 민족대표 33인이 대단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3.1 운동의 지도부는 이 운동이 평화집회가 되기를 원했지만, 민중은 폭동을 원했다. 지도부가 뭐라고 말하건 사람들은 집회 신고도 하지 않고 무작정 거리로 뛰어나와 연일 폭력시위를 했다. 3월 2일에는 진남포에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했고, 3일에는 개성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후 이 시위는 4월까지 이어지면서 관공서 습격, 상가 습격과 시장 파괴, 정치파업 등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한 달을 이어간 민중봉기는 당연하게도 운동권을 흥분시켰는데, 방정환도 다르지 않았다.

1919년의 시위 문화는 정부와 시민 양측의 폭력 수준을 제외하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쟁점이 격화되고 시위로 번질 때, 사람들이 SNS를 통해 자신이 동의하는 언론기사를 공유/리트윗하거나 심지어는 사비로 신문을 사서 거리에서 나눠주는 행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방정환도 1919년 당시 이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선언서를 집에서 등사하여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한편, 3월 1일자(1호)로 발간 금지된 조선독립신문(천도교 계열에서 낸 신문으로, 익히 아는 “독립신문”과는 관계 없다)을 이어서 몰래 발간하는 등 3.1 운동 소식을 널리 알리는 활동에 집중했다.

3월 초순을 넘어가면서 3.1 운동은 새로운 현상들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현상은 학생 평균연령 11~14세에 불과한 보통학교(오늘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3월 7일 오전 11시, 시흥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전원이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거리로 나갔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의 보통학교에서 구속을 불사한 동맹휴학이 연쇄발생하기 시작한다. 9일에는 전남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 12일에는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단행되었다. 14일에는 대구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준비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었다. 이후로 동맹휴학은 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교육과정 전반으로 퍼졌다. F.A. 맥켄지는 "한국의 독립운동"(이광린 역)이란 책에서 이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의 일화를 통해 표현했다.

... 수석한 소년인 열 두세 살 난 꼬마가 단상으로 올라가서 학교 선생들과 당국에 감사를 표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예의가 아주 몸에 배어 있었다. 절할 때마다 90도로 하였고, 경어를 길게 늘어놓은 폼이 마치 경어의 발음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귀빈들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숙한 식장의 분위기는 끝장이 나고 말았다. “이제 이것만은 말씀드려야겠습니다”라고 그 아이는 말의 끝을 맺었다.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는 몸을 폈다. 그의 몸에는 결의가 보였다. 지금 그가 외치려는 소리가 지난 며칠 동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것을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여러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태극기를 - 그것은 가지고만 있어도 죄가 되는 것을 - 꺼냈다. 그 기를 흔들면서 그는 소리쳤다. “우리 나라를 돌려주시오. 대한만세! 만세!” 소년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마다 웃옷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그들은 이제 겁에 질린 내빈들 면전에서 소중한 졸업장을 찢어, 땅바닥에 던지고 몰려나갔다.

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은 1919년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수업 방식이나 교원에 대한 불만 등, 학교 자치에 의한 사유나, 학교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항의성 행동이 대부분이었다. 1919년 3~4월의 동맹 휴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정치적 사유에 의한 동맹 휴학이었기 때문이다.

4월 중순이 되자 일제의 탄압 강화로 만세 운동은 풀이 꺾였지만, 동맹 휴학은 계속되었다. 보통학교를 시작으로 불붙은 동맹 휴학의 기세는 곧 각지에서의 소년회 결성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920년에는 각 종교운동의 청년조직에 소년부가 설치되었고, 1921년에는 전국적으로 14개의 소년단체가 결성되었다. 방정환이 소년운동을 결의하기 시작한 것도 1920년 즈음이다.

▲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 아동기관을 방문,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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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방정환은 1919년 조선독립신문 등사사건으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었다.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기소가 유예되기는 했으나, 방정환은 종로 경찰서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정치적 운신의 불편함과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 끝난 3.1 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번민하던 그는, 1920년의 어느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방정환은 일본 유학 당시 두 가지 조직적 책무를 맡고 있었는데, 하나는 천도교 청년회가 발간하는 종합잡지 “개벽”의 도쿄 특파원 역할, 또 하나는 천도교 청년회 도쿄지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방정환의 일본 유학시기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의 3년간인데, 이 시기 방정환은 두 가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하나는 아동문학을 자신의 운동 방식으로 삼기로 결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21년 3월에 방정환이 천도교회월보에 실은 글, “동화를 쓰기 전에 어린애 기르는 부형과 교사에게”에는 이 두가지 변화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어린이들이 새 세상의 새 일꾼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 일에 임하려 한다.”

방정환은 다음달인 4월 “개벽”지에 일본의 사회주의자 사카이 도시히코의 글을 번역해 싣는 것을 시작으로, 빈부 격차와 계급 갈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방정환이 개벽에 연재한 소설 “은파리”에서도 자본가에 대한 계급적 적대의식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 그것에 무산계급의, 가련한 노동자의 설움 많은 눈물이 묻어 있는 줄을 모르고, 칠 줄도 모르면서 허영으로 사다놓고 둥둥거리는 피아노의 울림에 무도한 유산계급에게 박해를 당하고 가난에 우는 빈자의 원성이 섞여 있는 줄을 모르시지요?

- 은파리, 방정환. <소파 방정환 평전>에서 재인용

방정환은 “은파리”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샀고, 그 결과 수없이 경찰서를 들락거리게 되었다. 방정환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주로 명예훼손과 치안유지법(오늘날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하다)이었다. 연재 도중에 방정환과 천도교청년회 도쿄지부 회원 전부가 구속을 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 없이 “은파리”에는 무산계급이니 자본가니 착취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개벽” 편집실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숱하게 들락거렸고, 편집부는 정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사회주의와 관련된 지면을 넓혀갔다. 천도교 청년당 창당(1923년 9월)을 전후해서는 “5월 1일은 어떠한 날인가”(1923년 5월호), “사회주의와 예술”(1923년 7월호), “국제무산청년운동과 조선”, “레닌 사후의 노농러시아”, “일본공산당 사건의 전말”(1924년 3월호), “세계사회주의운동의 사적 기술” (1924년 4월호) 등 거의 매호마다 사회주의 사상이나 동향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특히 방정환은 천도교 청년당 창당과 동시에 “사회주의 학설대요”를 5회에 걸쳐 번역 연재했는데, 이 글은 앞서 언급된 사카이 도시히코의 글이다.

편집진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벽”을 통해 짬뽕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인내천 사상은 이후 하나의 문장을 도출하게 되었다.

"만국의 노동자들아, 그대들이 힘있게 뜻있게 이 날을 기념하는 그 마당에 있어 그대들이 연결할 많은 노동자 가운데에는 전민족적으로 무산계급에 속한 조선의 대중이 있다는 것을 영념하라"

- 메이데이와 어린이날, 필자미상(방정환이라는 주장도 있다), “개벽” 1926년 5월호

방정환이 의암 손병희의 사위인데다가 천도교 신파의 핵심인물로 취급받고 있기는 하지만, “개벽”의 사회주의 지향이 방정환 한 사람의 변화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개벽”이 방정환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자연스럽다. 특히 “개벽”의 필진 중에서 방정환을 흔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개벽”의 주필이자 이후 천도교 청년당의 당수가 되는 소춘 김기전이다. 조선의 대중이 “전민족적 무산계급”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온 것 역시 그다.

이쯤에서 혹시 이야기가 새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을 가질 독자가 있을까봐 미리 말해두겠다. 소춘 김기전은 1922년의 어린이날을 개최한 주역으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 4일 오후 경기도 안성 팜랜드에서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어린이날 기념 도농교류 이벤트 '우리는 미래 농부' 행사가 열려 이 장관이 어린이들과 토마토와 상추 모종을 화분에 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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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의 아들 방용운의 증언에 의하면 방정환의 호인 “소파”는 김기전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소춘(小春)”과 “소파(小波)”는 둘이 한 짝인 셈이다. 김기전은 파격적인 주장들을 많이 했는데, 예를 들어 “신은 없다”고 선언해버린다거나 “장유유서를 말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유유서의 말폐” 주장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가 1920~1921년의 시기에 가장 적대한 것은 다름아닌 삼강오륜이었다. 김기전은 소년 문제에 대해서도 그 당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인격이 동등하다는 주장이다. 김기전의 시각에서는 어린이는 어른들에게 억압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을 해방시키기 전에는 소년 보호니 소년 수양이니 하는 기존의 소년운동 관점은 다 쓸모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해방시키기 위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전 본인부터 이 주장을 실천했는데,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전이 자신의 소년운동 이론을 정립해갈 때 쯤, 1919년의 동맹휴학 열풍에 이어 다시 한번 소년운동에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진주 소년회 사건이다.

진주 소년회 사건은 1920년과 1921년에 두 차례 일어난 만세 시위 미수 사건이다. 당시 진주소년회의 소년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쓴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려다 체포되었다. 이중 8명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중 16세 소년이 3명, 17세 소년이 2명, 19세 소년이 1명이었다. 김기전은 이 사건을 언론보도로 접하고 소년회 운동을 결심했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 청년회 산하에 있던 소년부가 “천도교 소년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천도교 소년회는 만 7세부터 만 16세까지라면 천도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입회가 가능했다. 이 천도교 소년회는 1년간의 활동 후 창립 1주년을 맞아 하나의 기념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22년 5월 1일의 “어린이날”이다. 이날 천도교 소년회는 종로 일대를 가두 행진하며 전단을 살포했고, 그들이 뿌린 선전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어린이의 날

①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②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③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④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⑤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⑥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⑦ 장가와 시집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이날 행사는 기념식과 가두 행진, 선전전, 축하회로 구성되었는데, 이 구성은 이후 어린이날 행사의 기본 구성으로 정착되었다. 1922년의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성공적이었음에도 다음해에 똑같은 구성으로 제1회를 다시 개최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1923년 4월 17일, 천도교소년회·조선소년단·조선소년군·불교소년회 등 40여 개 소년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하나의 연대체를 결성했다. 이 연대체의 이름은 “조선소년운동협회(朝鮮少年運動協會)”다. 조선소년운동협회가 합의한 것은 단 하나,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단체는 단지 어린이날을 크게 개최하기 위한 연대체에 지나지 않았다. 규모는 커졌지만, 헤게모니는 완벽하게 천도교 소년회의 손아귀에 있었다. 제1회 어린이날의 사전행사로 거행된 4월 28일의 “소년문제강연회”는 천도교당에서 열렸으며, 개회사는 김기전이 했다. 어린이날에 발표하기로 한 선언문,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은 김기전의 철학을 받아쓴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용이었다.

◇ 소년운동의 기초 조항

본 소년운동협회는 이 어린이날의 첫 기념되는 5월 1일인 오늘에 있어 고요히 생각하고 굳이 결심한 나머지 감히 아래와 같은 세 조건의 표방을 소리쳐 전하며 이에 대한 천하 형제의 심심한 주의와 공명과 또는 협동 실행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라.

①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②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③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계해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이날 서울 도심에는 “어린이 해방”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진 깃발이 나부꼈다. 선전문 20만장이 전국에 일제히 배포되었고, 기념식장에는 1천여명의 소년들과 소년운동 관계자들이 가득 모였다. 어린이날은 단숨에 소년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언론의 지원사격도 한몫 거들었다.

같은 날, 방정환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날은 색동회가 창립한 날이기도 한데, 이 겹침은 우연이 아니다. 방정환은 애초부터 색동회의 창립을 5월 1일로 하길 원했다. 방정환이 색동회 멤버들에게 주요하게 주장했던 것은 두 가지다. 매년 1회의 “어린이날”을 정하자는 것과, 제1회 행사의 시행을 발대식 날짜에 맞추자는 것이다. 방정환의 주장은 색동회의 창립과 함께 최종합의되었으며, 색동회의 첫 행사는 조선소년운동협회가 대리수행한 셈이 되었다. 색동회는 이어서 1923년 6월 10일 동아일보를 통해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의 개최소식을 알렸다. 7월 23일부터 5일간 열린 이 거창한 대회의 첫날은 김기전과 방정환의 기조발제로 시작되었으며, 색동회의 멤버들이 주요발제를 맡았다. 방정환이 발행하고 있던 잡지 <어린이>는 다음호에서 이 대회의 광경과 색동회 회원들의 사진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방정환이 어린이날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 때부터다.

조선소년운동협회가 등장하고 천도교 청년당의 소년운동 헤게모니 장악이 성공하자, 이를 경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역시 조선총독부였다. 1923년 5월 1일, 조선총독부는 사회사업연구회가 주최하는 형식으로 ‘아동위안회’를 개최했다. 사실상 어린이날의 맞불집회인데, 오늘날의 어린이날에 더 가까운 것은 이쪽일 수도 있다. 이 행사에는 약 400여명의 복지시설 수용 어린이가 동원되었다. 행사내용은 동물원을 구경한 뒤 장충단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선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어린이의 보편적인 권리 인정보다는 특정 처지의 어린이에게 시혜를 베풀자는 논리가 바탕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경찰이 복지시설 아이들을 용인 에버랜드로 초청해 연예인, 학교전담경찰관과 함께하는 '특별한 하루'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수원시 장안구 소재 한 아동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초·중학생 33명과 경기지방경찰청 명예경찰관인 탤런트 최란, 아동안전 홍보대사인 걸그룹 레인보우 멤버 지숙, 학교전담경찰관 9명 등 50여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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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 천도교와는 다른 경향의 소년운동도 급성장하고 있었는데, 바로 무산소년운동이라 불리는 것이다. 야학 운동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 운동은 방정환 일파의 소년운동을 “쌀밥 먹는 아이들을 위한 운동”이라고 공격했다. 세 번째 어린이날을 경과한 1925년 5월 24일, 무산소년운동 진영은 동아일보 기자인 정홍교를 중심으로 경성소년지도자연합회를 발족시켰고, 며칠후인 5월 31일 경성소년지도자연합회를 중심으로 서울지역 소년단체들이 연합하여 오월회를 창립했다. 오월회의 창립과 때를 맞추어 무산계급 운동을 표방하는 각 청년단체는 일제히 소년부를 설치하고, 무산소년운동 확산을 방침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6년에 이르러서는 양측의 세력 차이는 의미 없는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소년운동협회의 방정환과 오월회의 정홍교는 이미 대중에게 소년운동의 라이벌 지도자로 여겨졌다. 양측의 팽팽함은 어린이날을 소년운동협회가 주최할 것이냐 오월회가 주최할 것이냐의 시비로 번졌다.

정홍교 측은 소년운동협회가 상설기관이 아니라 어린이날을 위한 일시적 연합에 불과하므로, 안정적인 개최를 위해 오월회가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방정환 측은 폭넓은 연대를 위해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날을 주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다가 결국 서로 따로 어린이날 행사를 추진하는 파국에 이르렀다. 1927년, 조선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가 각각 따로 어린이날을 개최하자 소년운동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어린이날 각개 개최 사건은 운동사회여론에 의해 크게 비판받았는데, 서울에서는 중앙방침에 따라 각각 따로 어린이날이 집행되었으나 지역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공동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어린이날 행사에 대한 보고와 평가에서도 소년운동의 통합적 리더십 문제가 제기되었다. 얼핏 보면 오월회가 소년운동협회에게 정치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오월회가 빨랐다. 이들은 통합론을 역으로 이용해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했다.

1927년 어린이날 직후인 5월 15일, 오월회 측은 조선소년군총본부를 만나 “조선소년연합회” 발기에 합의했다. 명목은 “전 조선 소년운동의 통합”. 조선소년연합회 추진파는 5월부터 7월까지 전국을 돌며 지방조직들에게 발기인 가입을 권유했고, 발기인대회가 열린 7월 30일에는 69개의 참가단체명을 병기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16일에 열린 창립대회는 52개 단체, 80명이 넘는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출석대표 가운데 60여 명이 지방 소년단체의 대표들이었다.

조선소년연합회의 위원장으로는 방정환이 임명되었지만, 헤게모니는 오월회 측에 있었다. 조선소년연합회는 창립대회 직후에 열린 1차 임시대회에서 “감상적인 동요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물을 배척”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방정환의 확고한 패배를 알렸다. 그나마 이름뿐인 위원장 자리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28년 3월 25일, 조선소년연합회는 조선소년총동맹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새 위원장으로 정홍교를 임명했다. 조선소년총동맹은 주요한 결의사항으로 조직적 전환을 결정했는데, 종래의 자유 연합 형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로 전환하자는 내용이었다. 조직체계의 변환과 함께 방정환 그룹은 퇴진되었고, 조선소년총동맹(이후 종로경찰서의 강압에 의해 조선소년총연맹으로 변경)은 조직방침에 따라 지역연맹 건설에 힘을 싣게 되었다.

총연맹 지역조직화는 시작과 동시에 총독부의 탄압에 부딪혀야 했다. 총연맹의 존재만도 부담스러운데, 전국 소년운동을 통솔하는 중앙조직 탄생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1928년 8월 4일 전라남도연맹 창립대회가 금지 통고된 것을 시작으로, 전라북도연맹, 함경남도연맹 창립대회가 연이어 금지되었다. 심지어 같은 해 소집된 제2차 정기대회는, 경찰이 미리 주요간부들을 구속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사회과학적 서적 출판을 장려하겠다는 계획도 조선총독부의 출판서적 검열방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앙온건파와 지방급진파(경찰의 분류)의 갈등도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1928년 12월 27일에 열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의 구성에 있어 경성소년연맹 측(지방급진파로 분류된다)의 일부 인사가 부적격하다는 논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경성소년연맹 측 대의원이 전원 퇴장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중앙온건파는 이들의 퇴장 이후 대회를 계속 진행했고, 그 결과 부적격 인사로 지목된 이들의 권리가 박탈되었다. 그런데 이 해프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퇴장했던 지방급진파는 바로 다음날 대의원 파견단체 21개 중 13개 단체의 동의를 얻어, 정기대회를 다시 속개해 중앙집행위원회를 재구성했다.

중앙집행위원회가 하루에 한번씩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갈등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1929년 1월, 중앙온건파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사회파쟁적 기분을 일소”할 것과 “착란파 악분자”를 철저히 박멸할 것을 선언했고, 반대파는 “간부들의 망동”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다. 갈등의 연쇄 폭발은 1929년 8월에 이르러 완벽한 분열을 이루었다. 조선소년총연맹 중앙간부는 두 그룹이 되었고, 총연맹의 간판이 두 곳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1930년, 총연맹의 분열로 어린이날 행사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자, 경성소년연맹은 임시로 ‘어린이날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경성소년연맹의 안은 준비위가 일체의 행사를 준비하되, 개최는 총연맹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신문지상을 통해 알려지면서 즉각 타 조직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불법총회” 소집 논란에 휩싸이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1931년에는 다른 방식으로 어린이날 준비가 시도되었다. 정홍교 등을 중심으로 서울지역 소년운동지도자들이 모여 “전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그러자 며칠 가지 않아 “전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반대동맹”이 출범했다. 1931년 4월 12일에는 통영소년동맹이 어린이날을 반대하기로 결의 했고, 5월에는 밀양소년동맹이 어린이날중앙준비연합회 반대를 천명했다.

수없는 대립을 거듭하던 총연맹은, 1932년에 이르러 사실상 활동중지 상태가 되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제의 탄압도 더 심해졌다.

“수년간 간부가 모이지 않았다. 주위의 사정에 의해 정기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 한편 세포단체수가 약 18개소이지만 역시 지도자를 잃어 건의 해산된 상태이다. 현하 소년운동은 극도로 몰락했다.”

- 1932년 5월 31일 경성소년연맹 제3회 정기대회 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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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연맹의 갈등이 본격화된 1930년을 기점으로 소년운동은 완벽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방정환은 이듬해인 1931년에 “어린이를 부탁하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하지만 “어린이를 부탁할” 대상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933년 4월 8일, 경성소년연맹 마저 연맹해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34년, 정홍교는 불륜관계 여성의 음독자살이 크게 보도되어 “소년운동의 지도자”로 명함을 내밀기 어렵게 되었다. 1934년에는 오심당 사건(천도교 지하당 조직 사건. 요즘으로 치면 RO사건이라고 보면 된다)으로 김기전을 비롯한 천도교 총년당 간부들이 구속되고 당도 해체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어린이 대상 잡지인 “어린이”, “신소년”, “영데이”가 폐간되었다. 1935년에는 “별나라”가, 1938년에는 “가톨릭 소년”이 폐간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소년총연맹·경기도소년연맹·경성소년연맹 3개 단체가 해산, 통합되고 관변단체가 되었다.

해방 이후, 어린이날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지만 더 이상 “운동”과는 상관 없었다. 색동회는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고, 정홍교는 박정희 정권하의 보수논객으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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