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의 스물일곱 번째 시즌이 막을 내렸다. 프로야구 연간총관중이 사상 두 번째로 500만을 넘어서는 대성황 속에서 SK 와이번스가 2년 연속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를 휩쓸었고, 롯데 자이언츠가 8년 만에 가을야구의 한을 풀었다. 그리고 김광현과 김현수를 필두로 ‘젊은피’들이 대거 등장하며 올림픽 금메달의 쾌거를 이끌었고, 송진우와 양준혁과 전준호가 곳곳에 기념비들을 세워놓았으며, 케이블채널을 통해 거의 전경기가 생중계되는 가운데 해설가들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고 매 경기마다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감독과 선수들을 만날 수 있게 되면서 무수한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했다.

본격적으로 되새겨보자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풍성하고 다사다난했던 올 한 시즌을 돌아보며, 이 글에서는 두 가지만 짚어보기로 하자. SK 와이번스의 성공비결, 그리고 관중 500만시대의 함의.

▲ 10월 6일자 동아일보 24면.
SK와이번스, 왜 강한가?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온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었다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옳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경쟁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경쟁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비효율적인, 특권과 연고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 때문이다.

정규리그에서 2위 두산과 이미 열 게임 이상의 격차를 벌여놓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몸 풀듯 임했던 1차전을 제외하고 내리 네 경기를 따내며 우승컵을 들어올린 SK와이번스는 올 시즌의 절대강자였고, 따라서 SK와이번스가 강한 이유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야신’이라 불리는 감독 김성근의 전략과 운영, 김정준 과장을 필두로 상대팀 선수들의 사소한 몸짓과 버릇 하나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급소를 드러낸 전력분석팀의 예리함, 몇 년 간 꾸준히 전력보강에 힘써준 운영팀을 비롯해 선수들이 마음 편하게 운동할 수 있게끔 가장 모범적인 뒷바라지의 전형을 보여준 프런트.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를 들라면 나는 이 한 가지를 꼽겠다. 인맥과 특권의 힘을 끊어냄으로써 만들어냈던 완전자유경쟁의 질서.

한국사회 어느 곳이 그렇지 않겠는가만, 야구선수들도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팀의 ‘주전급’ 선수가 20명 안팎임을 생각하면, 실제로 경기에서 뛰면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진 프로야구선수는 대한민국에 불과 2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순간 이승엽은 ‘고교야구팀이 60개도 되지 않는 한국이 4천개가 넘는 일본을 이겼다’는 사실에 감격했지만, 사실 그 60개도 되지 않는 고교팀과 20개도 되지 않는 대학팀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천여 명 이상의 선수들 중 대부분은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처럼 두터운 마이너리그가 육성되는 것도, 일본처럼 광범위한 세미프로팀(사회인야구)이 구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선수들에게는 야구 외의 어떤 것도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 야만적인 풍토 때문이다.

어쨌든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감독과 코치와 선배들이 이미 거쳐온 명문고와 명문대를 졸업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인 데다가, 어르신들 충고대로 윗사람들과 정을 쌓기 위한 ‘물심양면의 노력’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몇 해 쯤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치면서 인정받아 스타급 선수가 된다면, 팬들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조금 여유있는 선수생활을 이어가더라도 자리를 빼앗길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

SK 김성근 감독은 야구감독에 관한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며, 실제로 장점과 단점 모두 두드러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능력 외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항상 혼자서 밥을 먹는 결벽증적인 태도, 그리고 30-30을 세 번이나 달성했던 호타준족의 상징 박재홍이나 WBC를 통해 ‘국민우익수’로 떠오른 이진영이라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가차 없이 쳐냈던 단호함으로 1, 2군을 통틀어 선수들에게 완전경쟁의 판을 깔아주었다는 점만큼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에 의해 바뀐 팀의 분위기를 SK의 어느 코치는 이렇게 전했다.

“원래 2군 선수들에게는 열심히 해서 1군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열심히 해도 어차피 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공존하고 있어요. 그런데 작년에 이름값 있는 선수들이 수시로 2군으로 쫓겨 오는가 하면, 2군에서 불려 올라간 선수들이 그대로 주전으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본 거죠. 그 뒤로 선수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죠. 지금이 자기 야구인생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많아요. 물론 자기자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고참 선수들도 이제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발을 하게 되고, 그게 자연스럽게 그냥 두어도 열심히 훈련하는 분위기로 이어진 겁니다.”

내년에도 SK가 강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어떤 선수가 빠져나가더라도 큰 공백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재홍과 김재현과 이진영이 주전명단에서 이탈했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이호준, 정경배, 박정권이 일찌감치 부상으로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 이재원, 나주환 등이 성장해 곧바로 공백을 메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성공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올해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감독 제리 로이스터를 영입했고, 그에게 메이저리그급 지도와 전술을 요구했다. 그는 자율훈련을 선언했고, ‘No Fear’를 외쳤다. 그러나 지도자가 강조만 한다고 해서 갑자기 창의적인 플레이와 과감한 플레이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창의적이고 과감한 플레이를 원치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팀 내의 인맥 따위에 대해서는 알 리도 없는 데다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권위까지 가진 로이스터 앞에서 선수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맥이나 경력 따위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다면, 선수들은 여전히 무언가에 기대고 의존하고 눈치를 보느라 발끝이 무거웠을 것이다.

500만 관중,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쨌든 야구장이란,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비록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긴 하지만 파란 잔디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드는 데다가, 낯선 이들과 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웃고 함께 탄성 지르며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다보면 뭔가 세상이 좀더 넉넉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통닭 한 마리 안주 삼아 생맥주 한 잔 들이키는 재미도 곁들일 수 있다.

그러나 더러운 의자, 냄새나는 통로, 불친절한 직원, 혹은 기껏 마음 먹고 들어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무기력한 경기. 그런 것들을 경험해본 사람이 야구장을 다시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선수 한 명을 사들이기 위해 수십 억의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구단이 왜 정작 팬을 불러 모으는 일에는 그렇게 인색한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할 것이다.

대개 한 구단이 해마다 지출하는 돈이 대략 200억 안팎이고, 벌어들이는 돈은 입장료 수입과 광고 수입을 합해 30억~40억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백수십 억의 적자를 감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그렇다면 돈이라면 ‘빠삭하게’ 계산을 하고 있을 대기업들이 굳이 적지 않은 적자를 무릅쓰고 프로야구 사업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첫째, 역대정권의 ‘협조요청’ 때문이고, 둘째, 이왕 안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승을 해서 모기업의 이미지라도 좀 꾸며주는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상 정권의 협조요청이 먹히지 않게 된 요즘에는 프로야구 사업에 흥미를 느끼는 대기업이 전혀 없다시피 한 사정이며, 지난해 매물로 나왔던 현대 유니콘스가 거저 주겠다는 제안마저 거절당하며 수모를 당했던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애초에 구단들이 수익성을 개선하려는 의욕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마지못해, 혹은 오로지 우승만을 위해 꾸려가는 가운데 팬에 의한, 팬을 위한, 팬을 위한 야구는 애초에 불가능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 시즌 야구장은 제법 대견한 발전을 이루었다. 가로전광판을 설치하고 어린이 놀이시설을 만들며 획기적인 개선을 시작한 문학과 사직구장이 대표적인 모범사례이며, 그 외의 구장도 안내직원들의 친절도와 구장 내부의 청결도는 전반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결실은, 관객의 수가 늘어났다는 단순한 수치 외에도 여성이나 가족단위 관객의 구성비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SK 와이번스가 지난해부터 주창했던 ‘스포테인먼트’가 대성공을 거두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야구장사만으로 독자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 히어로즈의 등장은 그런 점에서 야구에 대한 기업들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구단들이 ‘청와대의 뜻’이나 ‘총수의 뜻’이 아니라 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앞으로 야구장이 좀더 쾌적하고 즐거운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여전한 아쉬움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고 우려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우선 광주와 대구, 대전의 다 쓰러져가는 구장은 언제 개선될 것인지, 새삼 언급하기도 민망하다. 다만, 올 시즌 모든 매체들이 부산 사직구장의 열기에 주목하고 있지만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광주와 대구 역시 원정팀 선수들로 하여금 ‘경기고 뭐고 간에 일단 구장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라는 하소연을 하게 만들 만큼 열정적인 공간이었음을 각 구단과 연고 자치단체에서는 떠올릴 필요가 있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과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은, 담고 키울 수 있는 열기의 크기와 규모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팬들에게 서비스해서 버는 돈으로 독자생존하는 것’을 추구하는 히어로즈의 행보에, 야구팬들이 무작정 응원만 보내기 어려운 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체불명의 주체, 끝없이 이어지는 허언과 미심쩍은 언론플레이. 상식 이상의 선수연봉 후려치기와 속보이는 예비 FA관리. 결국 다시 내년 프로야구가 과연 8개 구단으로 운영될 수 있을 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걷어내지 못한 채 굴러가고 있는 히어로즈의 온갖 불투명한 안팎에 대해서는 한국야구위원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사실 야구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한다고 해서 떡 한 접시라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꼴찌를 한다고 해서 벌금을 낼 일도 없다. 그러나 컴퓨터 좁다란 모니터 앞에서 하루가 시작하고 마무리되며 회색 콘크리트와 검은색 아스팔트 안에서 종종걸음 치며 사는 우리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이라도 맘껏 울고 웃고 소리 지르며 희열과 아쉬움과 분노를 나누며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을 가진다는 것은 꽤 든든하고 흐뭇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야구위원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내가 올 한 해 프로야구의 진보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뭐 대충 그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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