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한국 사회의 모두가 쉽게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나는 그 때 늦잠을 자고 있었다. 전날 밤새도록 마셨기에 숙취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자고 있었다. 속보 알람 설정을 해놓은 뉴스 어플리케이션으로부터 진도 해상에서 배가 좌초했다는 소식을 잠결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흔히 벌어지는 해프닝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해프닝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나가는 사건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잠에서 서서히 깨고 습관처럼 포털에 올라오는 뉴스를 확인하고 나서야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모든 게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뭔가 해야 할 것이 잔뜩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직접 겪은 것도 아니었는데 뭔가 마음 한 구석이 턱하고 막힌 기분이 들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특히 글을 쓰기 싫었다. 이미 너무 많은 곳에서 글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었고, 딱히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글을 쓴다고 해서 대체 뭐가 달라지기나 할까? 칼럼니스트 한윤형이 예전부터 종종 글에서 언급했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무용(無用)함’이 어떤 기분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갔다. 모든 것이 불필요하게만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약 한 달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계속 글을 쓰고, 어딘가를 항상 돌아다녔지만 항상 불편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났다. 시인 도종환이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시 <화인>에서 말했듯, 이제 4월은 평범한 4월이 아니게 되었다. 한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불안감이 다시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글은 아무런 의의도,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자학적인 감정. 그리고 지난 일 년 간 무섭게 쏟아진 글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나에 대한 회의감. 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따라서 글로써 나름대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써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무작정 광화문 거리로 나갔다. 딱히 생각해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오늘 이 거리를 걷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분향소가 세워졌다. 많은 이들이 분향소에 헌화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왕십리에서 5호선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광장 쪽으로 나온 출구를 따라 세월호 유가족들의 농성장이 있는 방향으로 나가는데 평소에 보이지 않던 긴 줄이 보였다. 무슨 사건이라도 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가 바보같이 앞까지 다 가고서야 알게 되었다. 모두가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빨리 잊을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도 했거니와 다들 세파에 찌들어 많이 잊고 살거나 아니면 마음속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줄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에 헌화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일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잊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국을 빠르게 잊고 사는 공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은 역사적인 공간도 빠르게 뒤덮이고, 세상을 뒤흔든 대사건도 쉽게 잊히는 곳이지만 여전히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많았다.

농성장과 분향소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캠페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광화문광장의 돌바닥에 노란색 분필로 뭔가를 그리고 쓰는 사람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월호 참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쓰고 있었다. 구조되지 못하고 바다 밑으로 가라 앉고만 사람들에 대한 추모, 신뢰를 주지 못하고 갈등만 증폭시키고 있는 정부에 대한 질책. 평소에 쉽게 말로 하기 힘들거나 기껏 표현하더라도 인터넷 상의 의견으로 그치고 마는 말과 글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분필로 표현되고 있었다. 애초에 광화문광장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광장’이라는 기능 대신 전시성 공간으로 기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장에 모인 것에 이어 두 번째로 광장이라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이는 캠페인이 아닐 수가 없었다.

▲ 세월호 농성장 한편에는 광화문광장 바닥에 노란 분필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캠페인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수소문해 이 캠페인을 기획한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행동이 원래 세월호에서, 그리고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뜨개질로 자보를 만드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평소에 쉽게 보지 못하는 색다른 현수막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현수막은 기계로 인쇄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막에 아크릴 물감으로 손수 쓰는 식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렇게 제작된 현수막 말고도 직접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꿰매서 만든 수작업 현수막이 있었다. 이러한 작업을 광화문광장에서 하는 동시에 오늘은 농성장에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분필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리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분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캠페인을 기획한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표현을 하고 싶은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막혀있는 것이 많으니까, 그만큼 더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분필로 농성장 바닥에 글을 쓰는 곳 반대편에는 일군의 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단순한 이슈 파이팅이겠거니 싶었는데,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평범한 피켓이나 캠페인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끼손가락에 노란 물감을 묻히고 노란 종이배 모양으로 제작된 피켓에 찍도록 하고 있었다. 뭔가 사람들의 호응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평범하게 스티커를 붙여도 될 텐데 왜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학생에게 정중히 다가가 캠페인에 대해서 묻자 학생은 잠시 사라지더니 같은 곳에서 피켓을 들고 있던 교사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들은 대안학교인 이우고등학교의 대안예술팀에 속한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대안예술팀의 안정민 교사는 새끼손가락에 노란 물감을 묻혀 찍는 것은 ‘약속’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설명하였다. 아차, 그렇구나. 어렸을 때부터 약속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 이우고등학교 대안예술팀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월호 농성장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우고의 대안예술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대안예술팀은 ‘삶으로써의 대안, 대안으로써의 예술’을 기치로 내걸고 다양한 예술 영역을 주체적으로 배우는 곳이었다. 때로는 그림을 그리거나 연극을 하는 등 폭 넓은 예술 활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에 변화를 모색하고 활동하는 곳이 대안예술팀이라고 안정민 교사는 말했다. 그녀는 또한 대안예술팀이 처음부터 이렇게 단체 활동을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학생 개인이 세월호 관련 집회에 나간 적은 있었지만, 팀이 함께 집회에 나간 것은 대안예술팀의 한 학생이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문득 팀 내부에서 반대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교사는 약간 쓴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솔직히 저도 걱정했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모두가 동의하더라고요.” 대안예술팀은 올해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다양한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 그녀는 오늘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저 학생들이 예술로써 세월호와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활동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에요.”

농성장을 둘러보고 시청 광장에서 본행사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 경복궁 근처에 위치한 사진 전문 류가헌갤러리에 가기로 했다. 그 곳에선 세월호에 대한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세월호 농성장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전시도 보았다. 한 쪽에는 류가헌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전과 같은 맥락에서 열리고 있는 ‘빈 방’이라는 이름의 사진 전시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민주노총과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세월호 전후의 안전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풀어낸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정부는 세월호 사건 이후 계속 ‘안전’을 강조했지만 정작 안전을 위한 근본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소홀히 여겼다. 그저 ‘국민안전처’라는 이름의 새로운 부처를 만들고 몇 가지 요식적인 행사를 했을 따름이다. 건너편 정부서울청사에 걸린 두 개의 현수막은 이러한 허울뿐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한 쪽에는 큼지막하게 ‘국민행복 대한민국’, 다른 한 쪽에는 작게 ‘국가 안전대진단’ 기간을 강조하는 문구가 걸린 현수막. 하지만 어떠한 현수막도 어떠한 변화나 성찰을 담고 있지 못했다.

▲ 세월호 농성장이 위치한 광화문광장 건너편의 정부서울청사.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안전을 강조하는 두 개의 포스터는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담고 있는가.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서울청사 방향으로 길을 건너는 것은 쉬웠지만 다시 경복궁으로 건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경찰버스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의경들은 마침 버스 안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지만 이제 한동안 이 식사를 끝으로 밥을 먹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경찰버스의 줄에서 겨우 횡단보도를 찾아 경복궁을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골목길에 숨겨진 류가헌갤러리를 찾았다. 그곳에서는 두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하나는 ‘팽목에 서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언론사의 사진기자들이 현장에서 찍은 진도 앞바다, 그리고 팽목항과 유가족들이 머물었던 체육관의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을 담은 전시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전시 ‘빈 방’의 본편에 해당하는 사진전이었다. 분명 하나의 전시는 사건이 막 일어난 급박한 순간, 다른 하나는 사건이 지난 후 주인 없이 남겨진 방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전시이건만 기묘하게도 두 전시에 담긴 사진은 정적이었다. 설명이 없었다면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의 고요함.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진도에 머물며 한 명이라도 더 구조되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고, 대신 남겨진 것은 허탈한 마음과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방이다. 원래대로라면 피사체의 모습이 담겨야 할 사진은 피사체가 머물다 가버린 자리만을 다루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거나 지나치게 감정을 과잉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서도 정작 사람이 없는 방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충분했다. 이렇게 근래 한꺼번에 많은 방의 주인이 사라진 적이 있었는가. 물론 그 전에 몇 번씩이나 존재했지만 아무도 반성하거나 고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비극은 반복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전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빈 방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경복궁 근처에 위치한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갤러리’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두 개의 사진 전시가 19일까지 열린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우연하게도 전시에 참여한 사진작가 이재각 씨를 만났다. 그는 작년 12월부터 단원고 유가족의 부탁으로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진작가들과 유가족들 사이를 잇는 역할은 안산에 위치한 4.16기록보관소가 맡았다. 유가족들이 요청을 하긴 했지만, 유가족들의 집에 찾아가 빈 방을 촬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촬영 중에 겪었던 일을 묻자 그는 지금 말하는 것이 도저히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이런 날에 비가 내리고 있네요.” 그의 말대로 4월 16일에는 한동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리고 ‘약속의 밤’ 행사가 열리는 늦은 오후가 돼서야 비가 그쳤다. 정말 그 날 내린 비에는 어떤 기운이 담긴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시간이 오후 7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조금 발길을 서둘러 시청 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광화문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에 헌화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가는 동안에 마침 같은 대학교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에 한 분으로부터 운동단체 ‘청년좌파’에서 활동하는 이찬우 씨를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2013년에 조직에 가입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던 작년 4월부터 시작했다. 시기가 기묘하게도 겹치게 된 상황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그건 모두가 감정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다 충격이 컸을 거예요.” 그리고 그는 지난 일 년 간 세월호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났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운동하는 것에 비해서 세상은 너무나도 더디게 바뀌는 걸까요.” 그 말에 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멋쩍은 웃음을 짓고서 나는 다시 시청 광장으로 발을 옮겼다.

시청 광장에는 광화문광장보다 더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행사도 시작하지 않았건만, 잔디바닥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빈틈을 찾기 쉽지 않았다. 광장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어떤 부스를 발견하였다. 사회운동단체인 ‘사회진보연대’에서 최근 내놓은 두 권의 책을 팔고 있었다. 이 단체는 작년부터 ‘사회운동 작은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이슈에 대한 책을 내는 중에 있고, 그 첫 번째 책은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국내외 대형 참사에 대한 분석과 그 이유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박상은 씨를 만나 간단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상은 씨는 현재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에서 존엄안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빠르게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대형 참사가 한국만 아니라 외국에서 일어나잖아요. 대체 그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왜 그곳에서는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지를 찾아봤어요. 그렇게 쭉 보다보니 공통점이 보이더라고요. 대체적으로 이윤을 위해서 안전을 소홀히 하고, 그래서 큰 사건들이 벌어졌어요.” 또한 박상은 씨는 시청 광장에 오기 전에 청소노동자들이 뭉친 노조에서 세월호에 대한 오해를 푸는 짧은 강연을 했다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세월호를 기억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는 거. 참 씁쓸하지 않나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해진 다양한 폭력은 단순히 특정한 온라인 사이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행사인 ‘약속의 밤’이 시작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시청 광장에는 사람들이 계속 합류해 인도까지 넘쳐났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비록 그로 인해 무대와 거리가 멀어져 행사를 잘 볼 수 없던 것은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참 반가웠다. 안치환과 이승환이 노래를 부르고, 유가족들이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며 세월호 모형을 인양하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우연히 나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소식을 듣지 못한 사이에 한 사회적 기업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냐고 물으니 그는 그저 “간만에 시간이 남아서 오게 되었다.”고 짧게 답했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작년 성소수자들과 인권단체들이 서울인권헌장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서울시청 안이었다. 이렇게 시크한 대답에 나는 이따가 집에 잘 들어가라고 밖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헌화를 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역시나 경찰은 그 길을 막고 있었다. 광화문광장에서 시청으로 갈 때는 오 분, 십 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던 길에 이렇게 가기 어려울 줄이야. 계속 사람들을 따라 여기저기 이동했지만 경찰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벽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선 시위 때 항상 그러는 것처럼 해산을 종용하는 안내 방송을 할 뿐이었다. 차벽의 한 편에서는 의경들이 카메라로 사람들을 채증하고, 캡사이신이 가득 담긴 최루액을 뿌리고,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항상 그랬던 일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유가족들과 일부 시민들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버스 위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 역시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경찰들로 하여금 자리를 비키고 헌화를 할 수 있게 하라고 함성을 질렀다.

그때서야 나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눈앞에 놓인 차벽과 의경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오프라인에서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운동에 대해 깊은 악의가 담긴 발언과 생각들도 한동안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고, 계속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최근 일각에서 문제가 되었던 ‘침묵은 곧 동조다’의 역도 아니다. 여전히 모든 것은 쉽지 않고, 행동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지는 못한다. 그러한 상황은 아마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한다고 달관한다면 결국 그 또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마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대구 지하철이 불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여전한 것처럼. 더 이상 그러한 반복을 막기 위해서도,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일수도 있는 행동을 계속 진득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4월 16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낳은 짧은 고민의 결론이었다.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상황과 조건은 열악하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기반으로 삼으면서 움직여야만 하지 않을까. 내가 그날 만났던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오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전부 경찰의 차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 차벽과 세월호에 대한 편견은 쉽게 뚫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뚫기 위해선 지속적인 행동과 관심이 필요할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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