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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이 만든 '예술지원시스템'의 무의식, 그리고 전환[문화예술정책을 아십니까?] 1973년 체제의 붕괴①
염신규 /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 | 승인 2015.03.26 07:53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매우 낯설지만 예술인들에게는 익숙한, 그러나 실상은 역시 낯선 ‘문화예술진흥기금(문예진흥기금)’이란 것이 있다. 1972년 8월에 공포된 ‘문화예술진흥법(문예진흥법)’에 근거하여 설치된 공공 예술지원재원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유일한’ 공공 예술지원재원이다. 지금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공공 예술지원기구의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예진흥원)’은 바로 이 기금을 관리하고 배분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한 특수법인으로 1973년에 출범하였다. 1972년에서 1973년 사이,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제3공화국에서 유신정권(제4공화국)으로 넘어가던 바로 그 시기에 문예진흥법(제도) - 문예진흥기금(재원) - 문예진흥원(운영조직)의 삼각편대로 이뤄진 근현대적으로 제도화된 예술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임의적으로, 이 시스템을 1973년 체제라고 부르자.

   
▲ 1973년 10월 11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개원을 알리는 경향신문 기사

왜 하필 제도권 예술지원이 이 때 시작되었던 것일까라는 우문에서 출발해보자. 첫째, 물적 토대 부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옛말이 있듯, 식민 지배와 전쟁의 참화를 연달아 겪은 신생 공화국에 공공의 예술지원이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일단 예술을 창작하거나 즐길 수 있는 인구 자체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이뤄진 급속한 산업화의 성과는 신흥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국민 사이에서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만들었다. 당시에도 여전히 서울이나 부산 등의 일부 대도시를 벗어나면 문화 생활을 즐길만한 최소한의 기반마저 갖춰지지 못한 농산어촌이 상당수 존재했지만 대도시 인구의 급증과 텔레비전, 오디오 등 새로운 플랫폼의 보급이 예술의 잠재 향유층을 확장시켜 놓은 것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이렇다. 60년대 서양고전음악, 소위 클래식을 향유하는 방법은 연주회를 힘들여 가거나 시내에 있는 음악 감상실을 찾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개인가정으로의 오디오 보급이 급증하면서 취향에 따라 음반수집을 취미로 삼는 콜렉터,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매니아 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수동적인 향유층과는 달라진 새로운 향유층들은 예술의 질적 수준에 대한 자기 주장이 보다 분명했다. 이런 시장 환경의 변화는 분명히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정부가 경제발전의 과실을 갖고 사회전반의 발전을 견인하려 했던 점은 인정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비단 문화예술 분야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 기반 영역들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 많다. 이는 전쟁을 겪은 신생 국가가 당연히 겪어야 했던 발전의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문예진흥’으로 표상되는 최초의 공공적, 제도화된 예술지원의 태동기가 기묘하게도 10월 유신(1972)과 1974년 벽두부터 시작된 ‘긴급조치 시대’와 겹쳐져 있다.(이 사이에는 야당 지도자에 대한 사상 최악의 탄압이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이 존재했다) 한국의 공식적 예술지원이 파시즘, 혹은 유사 파시즘이 공화국의 민주적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비록 제3공화국 역시 5.16 군사 쿠데타에서 비롯된 정부였고 대통령인 박정희와 집권당이던 공화당에 정치 행위에도 비판할 부분이 적지 않지만 여하간 최소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견제가 존재했고 여-야의 정치적 경쟁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공화정의 양태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허나 유신 정권은 달랐다. 대통령(박정희)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 권력은 행정부와 국회와는 완전히 다른 층위에서 초월적인 절대권력으로 자리했고 비판적 여론조성이나 발언은 자의적 판단으로 영장없이 체포, 구속, 처벌될 수 있었다. 

   
▲ 문화예술진흥 기금 고갈 추이를 정리한 표 (자료=새정치민주연합 윤관석 의원실)


한국적 파시즘이 한국적 민주주의로 선전되된 시기에 시작된 ‘문예진흥’ 정책은 그런 권력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유신 정권의 문화예술 정책은 1974년에 시작된 “문예중흥 5개년 계획”(1974~1978)으로 대표되는데, 이것의 정책기조 및 기본방향으로 “전통문화의 계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이다. 파시즘 권력은 전통에 기대어 자신들의 도덕적 결함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고 ‘새로운 민족문화’ 혹은 ‘민족문화 중흥’을 앞세워 국가중심의 제도 예술을 육성하려 했다. 이런 파시즘적 문화통치의 기원과 속성을 좀 더 깊이 고찰하자면 식민 지배 시절의 문화통치나 과거 독일에서 자행된 나치스의 문화예술을 통한 프로파간다 전파 방식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대략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은 예술의 다양성이 아닌 종(種)단일성, 이를테면 민족예술이나 국가예술을 강조하며, 문화상대주의에 반하여 타 문화와의 상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문화와 예술을 민족적 우수성의 지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현재 시각으로 보자면 상당히 강력하게 국가주의적 입장이 관철되고 있는데 이런 파시즘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저항하는 반체제적 예술, 즉 불온예술을 즉각적 탄압과 금지의 대상으로 삼았음은 자명한 노릇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불온 뿐만 아니라 ‘퇴폐’나 ‘저속’도 해당되었다. 대중음악연구자 신현준 씨 등이 공저한 6,70년대 한국대중음악 연구서 <한국팝의 고고학 1970>에 따르면 1974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당시 대중음악에 대한 정부 측의 규제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불온하다’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정치적 탄압 못지 않게 문화적인 규제도 만만치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책을 잠시 인용하자면, 이정선의 “거리”의 경우 ‘불신풍조 조장, 냉소적’이라는 딱지가, 오세은의 “고아”의 경우 ‘지나친 비정, 불신감 조장’이라는 딱지가, 양병집의 “서울 하늘”의 경우 ‘가사 및 창법 방속 부적’이라는 딱지가, 김의철의 “섬아이”의 경우 ‘창법 미숙’이라는 딱지가 붙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975년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인 문화공보부가 내놓은 ‘공연물 및 가요정화 대책’을 보면 정화의 대상으로 ‘국가안전 수호와 공공질서 확립에 반하는 공연물’, ‘국력배양과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해하는 공연’,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공연물’, ‘사회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공연물’ 등 20개 항목을 정화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동백아가씨”(이미자)처럼 아무런 정치적 메타포도 담지 않은 노래도 창법과 음악 스타일을 문제 삼으며 금지시켰던 시절의 얘기다. 새로운 민족적 민주주의 국가의 중흥과 일상의 즐거움을 ‘밝게’ 노래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해 1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문화예술진흥기금 확충을 위한 정책 대토론회'에서 환영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입장에 따라 다른 평가가 이뤄질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1973년을 전후한, 어떤 한 시점을 통해 한국의 문화예술은 국가(공공)의 공식적 지원과 통제를 함께 갖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에서의 국가주의적 프로파간다를 앞세우는 방식과 통제적 입장은 유신정권은 물론 이에 이어지는 제5공화국까지도 전반적인 대세를 이뤘다. 1987년 6월을 지내고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시절과의 결별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특히 제도적으로 관성화된 흔적들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문예진흥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의 문화예술 관련법의 개념 설정에, 관공서에서 관행적으로 작성되는 숱한 관련 문건에, 그리고 심지어는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 속에도 여전히 유신 시절에 형성된 문화예술의 위상과 역할은 공고하게 살아남아 있으며 지속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왔다.

드디어 ‘1973년 체제’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해왔던 ‘문예진흥기금’의 완전고갈이 2년여 앞으로 다가왔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한국 예술의 젖줄 역할을 해왔던(누군가는 마약을 탄 젖이라고 부르지만) 문예진흥기금의 고갈 상황이 단순히 재원확충의 필요성과 국가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한국의 예술지원정책, 나아가서는 예술정책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한 상황이다. 다음 회에 그 부분을 본격적으로 다루겠다.

 

염신규 / 한국문화정책연구소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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