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이지만 이 남자를 어딘가에서 본 듯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박혜숙은 백윤석이 보통의 남자와는 달리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남자라고 계속 생각한다. 박혜숙의 기억이 다른 옛 사랑의 추억과 뒤엉켜서 데자뷰 현상이라도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다. 박혜숙의 직감은 정확하고 예리했다. 백윤석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백윤석은 지금의 박혜숙을 알아보지 못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여자는 자신의 입술과 처음으로 입맞춤한 남자를 평생 잊지 못한다. 박혜숙이 대학교 2학년일 때 자신의 입술을 처음으로 빼앗아간 남자가 백윤석이었기에, 20여년이 지난 백윤석이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었다 한들 여자의 직관으로 첫 입술의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슬픈 인연> 가운데서 백윤석과 박혜숙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박혜숙은 이혼해서 ‘돌싱’이 되었다고는 해도, 백윤석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다. 그럼에도 20대에 사랑으로 이어졌어야 할 인연을 너무나도 늦게 만난 것일까. 처음으로 입술을 빼앗아간 남자를 한 번에 알아보는 여자 박혜숙과,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백윤석의 만남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불륜으로 이어진다. 마치 20대에 피우지 못한 사랑의 연을 늦게나마 활짝 피우기라도 하는 듯, 백윤석과 박혜숙의 위험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 연극 ‘슬픈 인연’ ⓒ국립극단
그럼에도 이들 남녀의 불륜은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륜과는 차별화된다. 이들 남녀가 젊었을 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두 남녀의 성격적인 불찰 때문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폐해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정당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백윤석의 아버지는 군사정권 당시 민주화를 위해 땀 흘려 투쟁하지만, 그의 투쟁을 달가워하지 않는 군사 정권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백윤석의 아버지는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군사 정권의 폭압은 일본으로 떠난 백윤석의 아버지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연좌제라는 당시 사회적인 그물은 사회 운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백윤석을 포획하기에 다다른다. 백윤석의 아버지는 사회 운동을 했을 뿐이지 빨갱이가 아니다. 하지만 공안 정권은 일본으로 피신한 백윤석의 아버지를 간첩으로 몰아세운다.

‘칼 막스’와 ‘막스 베버’를 동일한 인물로 바라보는 무식한 공안 정권의 취조관은, 막스 베버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칼 막스의 서적을 백윤석이 읽은 것으로 간주한다. 한 술 더 떠 취조관은 백윤석이 사회론 강의를 들은 것을 빨갱이 물이 들어서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수강한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그리고는 백윤석의 아버지를 남파 간첩으로 몰아세우고는 백윤석에게 아버지가 빨갱이였다는 걸 자백하게끔 몰아간다.

▲ 연극 ‘슬픈 인연’ ⓒ국립극단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었으니 아버지를 간첩이 아니었다고 진술하는 백윤석의 주장은 정당하다. 하지만 백윤석의 육신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고문은 백윤석으로 하여금 허위 자백을 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었음에도 간첩이라는 진술서에 서명을 해버린다. 공안 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이 한 개인의 정체성을 ‘빨갱이의 아들’로 허위 날조해 버린다. 백윤석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이, 공안 정권의 인위적인 잣대에 의해 바라지도 않던 거짓 정체성,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다.

공안 정권이라는 타의에 의해 하루아침에 간첩의 아들이 되어버린 백윤석은 사랑하는 여자 박혜숙을 뒤로 한 채 군대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꽃을 피울 사이도 없이 공안 사범의 아들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 탓이다. 이에 백윤석은 전도유망한 법학도의 길을 걷지 못하고 전파상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트라우마가 그의 장래를 뒤바꿔 놓았으면서, 동시에 아름다웠던 시절의 사랑마저도 박탈한 탓에 백윤석의 인생 행보는 프로이트의 원인론, 트라우마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슬픈 인연>이 여느 불륜과 달리 동정표를 얻을 수 있는 건 보통의 불륜이 남녀의 불장난에서 비롯하는 것에 비해, 백윤석과 박혜숙이 사랑의 연으로 맺어질 수 있었던 타이밍이 군사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비롯한 ‘공안 사범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몇 십 년 뒤로 늦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의 구원

▲ 연극 ‘슬픈 인연’ ⓒ국립극단
백윤석이 첫 입술의 그녀와 몇 십 년이 넘어 해후한다는 건 군사 정권의 폭압이 있기 전 창춘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시절의 회귀로도 읽힌다. 백윤석이 군사 정권의 폭압이라는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건 박혜숙이라는 노스탤지어를 만남으로 백윤석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로도 읽히기에 그렇다.

박혜숙은 옛날에 만났어야 할 연인을 지금에야 뒤늦게 만난 데 그치지 않는 인물이다. 백윤석은 무기력에 젖어 있는 인물이다. 전도유망하던 학창 시절, 육체적인 고문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한순간에 간첩으로 진술해버린 것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무기력에 젖어 있는 인물이다. 이런 백윤석이 박혜숙을 만났을 때 수십 년간 젖어 있던 무기력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박혜숙은 백윤석이 무기력하게 행동할 때마다 백윤석의 무기력함을 품어주지 않는다. 못마땅하게 생각하고는 무기력에서 극복할 것을 백윤석에게 주문하고 또 주문한다. 연인의 나쁜 품성이라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에서 벗어나라고 연인 백윤석에게 주문하는 것이다.

이렇게 박혜숙은 백윤석에게 있어 복합적인 인물이다. 군사 정권의 폭압이라는 젊은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노스탤지어’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무기력이라는 백윤석의 그릇된 관성을 극복하고 벗어나게 이끌어주는 ‘교정’으로서의 기능 두 가지를 수행하는 인물이 박혜숙이다. 백윤석에게 있어 옛 연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남자의 구원으로 작용한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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