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미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민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최종 결론이 나왔다. 인권위는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경찰이 일부 과도한 공격진압을 해 일부의 시위대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인권침해를 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지휘책임을 물어 경찰청장에게 경고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보수신문들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폭력시위’와 시민들이 주장해온 ‘폭력진압’ 사이에서 인권위는 시민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지난 5월부터 장장 3개월간 거의 날마다 거리로 나와 “미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하라”고 외치던 많은 시민들에게 매우 상식적인 결정이다. 다만, 인권위가 보수신문이 ‘폭력시위’의 결정적 근거로 든 ‘시민들이 경찰을 집단 구타한 사건’(6월 29일 새벽, 광화문에서 발생)에 대해 목격자 증언과 당시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을 토대로 경찰이 시민의 폭력시위를 유도한 정황이 많이 드러났는데도 이에 대한 조사조차 하지 않고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 조선일보 6월 30일자 1면 톱을 장식한 사진
게다가 지난 27일 국가인권위는 이같은 결정을 내리기 전 김양원 인권위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을 막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경찰까지 투입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온 장애인을 비롯한 시민단체 사람들은 전경들에게 항의하다가 사지가 들린 채 밖으로 끌려나왔다. 이들은 ‘약자의 편이어야 할 국가인권위가 이러면, 앞으론 어딜 가서 하소연해야 하느냐’라며 울분을 토해야만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진보·보수신문 둘다 아예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신문들은 이렇듯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인권위의 ‘권고’(강제력 없음) 결정이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국가 독립기구이긴 하나 예산·인사에서 정부·의회의 감시를 받는 태생적 한계 탓에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인권위는 ‘종이 호랑이’가 돼버렸는데도, 촛불집회에서 시민들로부터 많은 규탄을 받았던 조선·동아일보 등 보수신문들은 “인권위원들은 폭력시위대가 휘두르는 낫에 살점이 뜯겨나가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등 섬뜩한 말을 내뱉으며 인권위 결정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인권위 결정을 가장 선정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다. 경향·한겨레가 인권위 결정을 1면 톱과 사회면 톱으로 다루며 비중있게 다룬 데 비해 조선일보는 28일 12면 하단 <인권위 “경찰이 촛불시위 과도하게 진압”>에서 인권위 결정내용을 보도했다.

▲ 조선일보 29일자 사설
29일자 사설 <인권위, 폭력시위대 낫에 살 찢겨보고 대답하라>에서는 “지난 6월 30일자 조선일보 1면에 촛불시위 진압 전경 100여명이 시위대에 둘러싸여 쇠파이프, 각목, 발길질로 매타작하는 사진이 실렸다. 6월 28일 밤~29일 새벽 서울 광화문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어떤 전경대원은 경찰버스 뒤에서 밥을 먹다 시위대가 막대기에 매단 낫을 차 아래로 휘두르는 바람에 발목이 찢겼다”며 인권위 결정에 대해 “대한민국 법으로 만들어져 국가 예산을 쓰는 국가기관의 결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인권위가 경찰의 물대포와 소화기에 대해 ‘인체 위해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을 두고 “물대포와 소화기는 시위대가 철근 절단기로 경찰버스를 분해하고 새총으로 쇳조각을 쏘아대는 데 맞선 최소 수단이었다”며 “이번 결정을 내린 인권위원들은 다음 폭력시위 때 반드시 경찰 곁에서 (폭력시위대가) 휘두르는 낫에서 살점이 뜯겨나가는 경험을 경찰과 함께 나눠봐야 한다”고 저주에 가까운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말하는 6월 29일 새벽에 벌어진 사건은 목격자의 증언과 동영상을 토대로 ‘경찰의 폭력시위 유도’ 정황이 많이 드러난 사건이다. 만약 경찰의 폭력시위 유도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사회에 미칠 반향이 상당한데도 인권위는 이에 대한 조사조차 하지 않아 당일 현장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고재열 시사IN기자는 블로그 독설닷컴(6월 30일 포스팅, ‘오늘 조중동 1면 사진의 진실’)에서 “검은 전경이 달려들어 약 1만 명의 시위대가 뒤돌아 도망치면서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때 인상적인 한 부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틈새로 빠져나와 진압을 시작한 부대인데, 그들은 도로를 대각선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는 프레스센터 앞 쪽에 와서 원형으로 모여 웅크리고 방패로 자신들을 보호했다”며 “그들은 고립되기 위해 온 부대처럼 보였다”고 밝혔다.

고 기자는 “냉정하게 봤을 때, 그들은 어청수 경찰청장이 격앙된 시위대에 내놓은 ‘떡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약 6분간 진행된 폭력 때문에 그날 집회에 참여했던 10만명의 시민이 ‘폭도’로 매도되었고 조중동은 (다음날) 신문 1면에 실을 소중한 사진을 건졌다”며 “강북삼성병원에서 만난 부상 전경에게 ‘왜 후속 부대도 없는데 시위대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우리는 그저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블로거 ‘자그니’는 당시 상황을 동영상(http://news.egloos.com/1777217)으로 담아 고 기자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28일 12면 1단 기사 <쇠고기 시위대 진압과정 인권위 “경찰이 인권침해”>에서 인권위 결정을 축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인권위가 ‘노무현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젠 지겹고 안쓰럽기까지 한 주장을 내놓았다.

동아일보는 29일자 사설 <‘촛불진압 인권침해’ 결정, 균형 잃었다>에서 “인권위 결정은 5월부터 석달여간 서울 도심을 거의 마비시켰던 촛불시위의 전반적 양상에 비추어 균형을 현저하게 잃었다”며 “급박한 진압 상황에선 경찰이 행사하는 물리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 한다. 인권위가 아직도 ‘노무현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28일 2면 <인권위 “촛불진압때 인권침해” 경찰 “불법 묵과하란 말이냐”>에서 경찰청장 권고, 서울경찰청 기동본부장과 4기동단장 징계권고, 물대포 사용 구체적 규정 마련, 소화기 사용금지 등 인권위가 내놓은 9가지 권고안에 대한 일선 경찰들의 반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29일자 8면 취재일기 <시위진압 경찰의 이유있는 항변>에서는 ‘국가기관이 직접 나서 폭도를 두둔하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불법시위를 조장하는 꼴이다’ 등 인권위 결정에 대한 시위 진압 경찰들의 이유있는(?) 항변을 전달했다.

세계일보와 국민일보도 29일자 사설에서 각각 “불법집회 시위자의 인권만 있고 경찰과 시위의 피해자인 다수 국민의 인권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불법 시위대가 경찰과 다른 시민을 폭행하고 경찰 차량에 불을 지르고 건물 등 사유재산을 파손하는 짓을 저질러도 경찰은 거의 손놓고 있으라는 얘기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권익을 위해 굳이 인권위가 필요하다면 그 목적에 맞도록 인권위를 환골탈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인권위 결정을 비중있게 전달하며 “이젠 정부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인권위 결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다룬 경향신문은 28일 1면 머릿기사 <인권위 “촛불진압때 인권침해”> 8면 사회면 머릿기사 <“촛불 불법여부 떠나 경찰 인권침해 명백”>에서 인권위 결정의 의미, 향후 전망 등을 분석했다.

29일 8면 사회면 머릿기사 <“촛불진압 정당” 반성없는 경찰>에서 인권위 결정에 대한 법무부와 경찰의 반박 목소리를 보도하며 “국가기관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행위다. 경찰의 집회 대응방식이 더욱 거칠어질까 걱정된다”는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의 주장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29일 사설 <정부는 인권위 결정 겸허히 수용해야>에서 “인권위의 이런 결정은 사건 발생 3개월만에 내려져 새삼 눈길을 끌긴 하지만, 당시 있었던 경찰의 과잉진압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사필귀정이다. 아무리 집회가 불법적이라 해도 비폭력 평화시위대를 방패로 내려찍고 구둣발로 짓밟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당연하기 때문”이라며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공식결정을 내린 만큼 이젠 정부도 달라져야 한다.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한국정부는 앰네스티의 권고도, 국내 인권위 말도 안듣는 인권후진국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29일 8면
한겨레도 28일 1면 하단 <인권위 “경찰, 촛불집회 인권침해” 결론> 8면 <인권위 “경찰 과도한 공격진압” 못박아>에서 인권위 결정을 다루고, 29일 사설 <정부는 인권위 권고를 즉각 수용하라>에서는 “독립적 국가기구의 조사결과인 만큼, 정부와 경찰도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권한 남용과 인권 침해를 국민에게 사과하는 게 옳다”며 더 나아가 “경찰의 인권침해는 (인권위 결정을 통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니, 마땅히 고발 등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인권위의 결정과 진보신문들의 주장에도 정부와 경찰은 여전하다. 그동안 촛불집회 과정에서 경찰이 시민들을 과잉진압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적법한 공권력 행사’라고 주장해온 정부·경찰은 이번 인권위 최종 결론이 나왔음에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는 것 외에 다른 대응 방침이 있을 수 없다. 인권위 결정은 향후 경찰의 대응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단기적으로 찍어 누른다고 해서, 모든 게 다 해결될까. 행위의 성격을 떠나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공권력의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어도 좋은지에 대한 논쟁은 둘째치더라도, 촛불집회 폭력 사태에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이 명확하다.

집회현장에서 경찰이 휘두르는 물리적 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국민들이 지난 몇달간 거리로 나와 목이 쉬도록 외치는 것들에 대해 완전히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다. 정부는 촛불시위대를 ‘폭도’라고 매도하지만 말고,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신문들도 옆에서 이를 거들지만 말고, 시민들의 상식 선에서 내려진 인권위의 이번 결정을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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