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드디어 청와대 비서실장을 임명했다. 모두가 고대하던 바로 그 일(!)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혼란과 좌절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발표된 인사는 국민들과 정치권이 원하던 성격이 전혀 아니다. 현직 국정원장을 대통령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의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을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수석대변인은 “음지에서 일하는 정보기관의 수장을 국정운영의 중심인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은 사상 유례없는 잘못된 인사”라고 혹평했다. 김영록 수석대변인은 “인사혁신을 통해 국정운영기조를 바꾸라는 국민의 요구를 거부한 불통 인사이며, 국민 소통과 거리가 먼 숨 막히는 회전문 인사”라면서 “정보정치, 공안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지적했다. 정의당 김종민 대변인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정보부 통치시절이 연상되는 인사로 암흑의 공작 정치가 부활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면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교체하랬더니 오히려 ‘김기춘 열화 버전’을 데려다 놓은 것”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이 직전 국정원장인데 더해 1997년 북풍공작, 소위 ‘차떼기’로 불리는 2002년 대선자금 모금 등에 개입돼있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음모와 공작의 대가처럼 비춰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인물을 비서실장에 임명해 그간의 불만과 의혹을 일소하라는 주문이 있었으나 대통령은 이를 깡그리 무시한 채 여전히 ‘하던대로 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셈이다.

실제로 그간 진행된 청와대 개편의 과정을 보면 김기춘 비서실장만 없을 뿐이지 김기춘 비서실장 시대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어떤 대통령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요직에 앉히고 싶어하는 인사는 국정원·검찰 등의 수사 및 정보기관이나 군 출신인 경우가 많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해서 정홍원 전 총리의 경우 검찰출신이었고 남재준 전 국정원장과 김장수,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등이 군 출신 인사였다. 나이로 보자면 ‘7인회’ 등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노인인 경우가 많다.

이를 하나의 맥락으로 묶어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선호하는 통치 방식이 눈에 보인다. 군을 포함한 정보 및 수사기관을 청와대가 틀어쥐고 이를 통해 민감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장에 막강한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때문에 비서실장은 충분히 유능해야 하고 또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큼 ‘사심이 없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현역에 가까운 사람들은 대개 나중을 기약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으므로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러니 자꾸 후일을 기약할 필요가 없는 ‘노인’이 불려나오는 것이다.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 역시 1947년생으로 결코 젊은 나이가 아니다.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의 탄생으로 지명된 이병호 국정원장 내정자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병호 내정자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이미 90년대 초반에 안기부 2차장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사실상 은퇴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그가 거의 20년 만에 돌아온 것 역시 ‘사심없이’, ‘나라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국정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라는 키워드는 박근혜 정권에서 늘 중요한데 김기춘 전 비서실장 역시 수차례 이렇게 말한 바 있고 이완구 국무총리도 지명 직후에 이런 말을 했었다.

다만 검찰, 법무부, 국회를 두루 거친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 비하자면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은 외교부와 국정원을 거친 것 외에 두드러지는 경력이 없다. 오히려 ‘김기춘 체제’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체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 청와대 개편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개편돼왔다. 이를테면 경제정책과 연관된 정부 각 부처의 기능의 조정은 이 정부 들어 중용되고 있는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인사인 현정택 정책조정수석이 맡는다. 검찰의 경우 현재 우병우 민정수석과 이명재 민정특보가 충분한 장악력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국회의 경우는 그간 설치 여부가 논란이 돼왔던 정무특보단을 새로 만드는 것으로 결론이 난 셈이 됐다. 정무특보단은 주호영, 김재원, 윤상현 의원으로 구성돼있는데 주호영 의원은 현재 비주류가 중심이 돼있는 지도부와의 연결고리로 움직일 수 있으며 김재원, 윤상현 의원은 청와대의 의중을 직접적으로 여당 내에서 관철하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인원 구성을 고려하면 그간 당청관계의 일정한 변화에서 다시 무게중심이 청와대로 쏠릴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데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와 관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현직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이고 정무특보는 대통령의 특별보좌역인데, 현직 국회의원이 정무특보가 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다”면서 “특보단을 두려면 야당이나 당내 소외된 그룹과 대화가 잘 될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반영이 되지 않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렇듯 국정원, 검찰, 행정부, 국회에 대한 개입과 통제라는 큰 그림의 정점에 청와대와 이병기 비서실장이 위치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만사를 청와대가 다 틀어쥐고 간다는 점에서 ‘김기춘 없는 김기춘 체제’라고 불러도 무방한 그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야권이 주장한 통치 스타일의 변화와는 전혀 조응하지 않는 인사라는 평가를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청와대의 체계를 바꾼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러려면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이후 자신부터 변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공표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업무를 추진해나가는 것을 직접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인사를 정말 어쩔 수 없이 이런 방식으로 했다 하더라도 대통령이 변화의 의지를 가지면 그건 또다른 차원에서 평가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에게 그런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새롭게 임명되거나 교체된 인사들에 대해 형식적이거나 잘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을 내놓는 것이 그 증거다. 아무래도 남은 3년 또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뭘 제대로 하겠다는 내용도 없이 모든 것을 챙기고 통제하려고만 하는 ‘지리멸렬’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지지율 30%를 넘기지 못하는 대통령의 통치 방식을 고려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밖에 평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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