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들을 보면 뭔가 거대하고 무거운 주제를 들고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진정으로 이 사회에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주제를 담아낼 디테일의 제한으로 인해 결국은 이도저도 아닌 끝을 보이게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가벼운 주제더라도 제대로 이야기의 힘을 또한 연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낫겠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그런데 때맞춰서 딱 그런 드라마가 찾아온 것 같다.

25일 시작된 KBS 새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 먼저 시선을 끈 것은 출연진 명단이다. 김혜자, 채시라, 도지원 그리고 이하나까지. 여자들 이야기니 당연히 주연들이 모두 여자 연기자들인 것도 흥미롭지만 그 여자들을 이끌어 갈 배우 김혜자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이 드라마를 봐야 할 이유가 된다. 무려 김혜자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리고 작가가 김인영이다. 김인영 작가는 ‘여자’로 유명하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 ‘태양의 여자’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의 드라마 제목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다가 최근 두 작품은 ‘적도의 남자’에 이어 ‘남자가 사랑할 때’로 잠시 남자로 관심을 옮겼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여자’가 아니라 ‘여자들’로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 여자들이라는 것이 정확히 말하면 여자 3대다. 강순옥(김혜자)과 그 딸들 김현숙(채시라)와 김현정(도지원) 그리고 손녀 정마리(이하나) 등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다보면 행운은 몰라도 불행은 몰려오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행복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만끽하려는 찰나에 온다. 불행만큼 타이밍이 절묘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여자 3대가 딱 그렇다.

우선 이 여자들 중에서 불행의 첫 키스를 받은 여자는 김현숙이었다. 저축은행 사태로 돈을 몽땅 날렸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강순옥에게도 민폐를 끼치게 됐다. 현숙은 그 순간에 친구에게 돈 백만 원을 빌어 도박판으로 향한다. 그 마지막의 선택조차 참 현명치 못하다. 보통은 그렇게 도박판을 기웃거려도 더 망가질 뿐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망가지는 과정이 조금 더 기발했다.

백만 원을 밑천으로 시작한 도박에서 승승장구하는 현숙이다. 그리고 정말 큰판에서 장땡(필시 은유가 담겼을 것이다)을 잡아 판을 끝낼 무렵 하필이면 경찰의 단속이 들이닥친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것이 딱 이럴 때 어울린다. 그나마 운 좋게 단속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이미 현숙에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없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라고는 전혀 없다.

현숙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다. 깡소주 몇 병을 비우고 세상을 버릴 것처럼 자빠지는데 바람에 날린 신문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교육자상을 받은 한 교사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그 선생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고1학년의 현숙을 퇴학시킨 선생 나말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상은 현숙의 불행이 시작된 곳으로,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에 퇴학당한 그 억울한 때로 돌아갔다.

불행의 끝에서 재회한 나말년의 기억은 다 포기하고 죽음을 맞으려던 현숙에게 오기를 발동케 했다. 이 모든 불행이 알고 보면 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 잊고 있었지만 죽고자 했던 순간에 떠올린 악연은 희망보다 더 강력한 삶의 이유가 돼버렸다. 고로 현숙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현숙에서 이 불행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순옥의 두 딸과 손녀 모두가 불행의 도미노에 휩쓸리고 있다. 남의 이야기 같지만 가만 따져보면 우리 모두가 비슷한 세월을 살고 있기에 당연히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 여자들의 불행이 끝나는 지점에 해피엔딩이 있을지 아니면 해피엔딩을 대신할 다른 무엇, 행복하지 않아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평범하지만 새삼스럽게도 절대 변하지 않을 무엇을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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