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달관 세대’라는 걸 밀고 있다. 인터넷엔 23일에서부터 25일까지 게재된 특집기사를 비웃는 얘기가 가득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엔 ‘달관’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꽤 있다. 우리가 도를 닦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뀌지도 않을 일들에 계속해서 열을 내어선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가 야심차게(!) 내놓은 달관세대 기획 첫번째 편.

짜증을 그만 내기 위해 서로에게 필요한 세 가지 ‘달관’

먼저, 우리는 <조선일보>에 대해 ‘달관’해야 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악한 보수언론으로, 사회문제를 모르는 것 같진 않지만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그것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 건에 대해 말한다면, (후반부에 다시 짚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놈의 ‘달관’을 실행할 수 있는 청년들은 아무래도 극소수다. 그러니 <조선일보>가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본따 ‘달관 세대’란 말을 만들어냈다면, 적어도 어째서 한국의 ‘달관 세대’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비해 극소수일 수밖에 없는 지를 분석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일보>가 ‘적어도’를 준수하지 않는 것에 ‘달관’해야 한다.

<조선일보>도 우리에게 ‘달관’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일보>는 가장 오랜 역사와 탄탄한 물적 조건, 편협하지만 훌륭한 취재능력을 가진 신문이다. 어떤 취재는 아예 날조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가끔 훌륭한 특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SNS에서 <조선일보>의 기사는 보통 ‘낮은 수준의 것들’만 화제가 된다. 최근 몇 년 간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이유는 아마도 ‘프리미엄 조선’이란 이름의 회원제 유료 정책의 실패 탓일 것이다.

가령 2013년 11월에 게재되었던 <조선일보>의 특집 기사인 ‘한국인의 마지막 10년’은 보수언론이 기성세대의 편견에 맞서 청년세대의 처지를 알린 드문 기사였는데 화제가 되지 못했다. 이 특집은 어째서 한국의 청년세대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가 될 수밖에 없는 지를 적절하게 해명한다. 생애의 10단계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지나치게 증대되어 오히려 윗 세대들보다 현재의 젊은이들의 인생이 팍팍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기사다. 거기서 생략할 수 있는 비용은 사실상 연애, 결혼, 출산 밖에 없을 것이기에 이들은 삼포세대가 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그런 몇몇 특집 기사와는 별개로 그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의 권력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 바 없으니 인터넷의 반응도 정당하다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조선일보>의 ‘달관’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달관’해야 할 것은 <조선일보>의 교묘한 노림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반응이다. ‘달관 세대’ 특집 기사 밑에는 ‘달관’한 청년들을 질타하는 이 신문 독자들의 댓글이 제법 보인다. 주요 내용을 일별해 보니, “아둥바둥 살지 않으면 지금은 만족스러워도 결국엔 뒤쳐지는 인생을 산다”, “청년들이 치열하게 살지 않는 나라엔 희망이 없다” 정도의 훈계가 그분들이 하고 싶은 말인 듯하다. 하긴 일본에선 노인들이 자국 청년들이 한국처럼 군대에 끌려가지 않아서 패기가 없다고 까곤 한다니 양국 기성세대의 견강부회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수준 낮은 기사만 화제가 되는 조선일보, 1등 신문이 ‘양치기소년’이 된 이유는?

그들은 <조선일보>의 고심을 무시했다. <조선일보>는 ‘적어도’ 기사에 등장한 이들이 더욱 아둥바둥 살아봤자 제 삶의 문제는 물론 사회의 문제도 풀리지 않을 거란 걸 아는 듯하다. ‘야근’과 ‘과로’가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건 회사가 오래 존속하면서 제 삶을 희생한 사원에게 적정한 대가를 지급할 수 있을 때 정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과연 몇 개의 조직이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개인의 입장에서도 스타트업 같은 지극히 특수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되도록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건강관리든 자기계발이든 일단은 퇴근을 한 다음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사회 문제로 봐도 마찬가지다. 청년층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거의 공급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체제의 입장에서도 다수의 청년들이 ‘야망을 가지고 분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달관’하는 편이 낫다. <조선일보>는 ‘자리’가 줄어들었을 때는 청년에게 ‘열정’을 요구했던 그 체제가, ‘자리’가 너무 줄어드는 이 시점에 와선 ‘달관’을 요구할 필요도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달관 세대’를 일관되게 청년들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23일 오후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올라온 박은주 기자의 칼럼 <전국민 태극기달기 운동? 달관세대에게 물어보라>를 보면 “우리보다 먼저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의 사토리(달관) 세대 현상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겁니다. 국가 동력이 녹슬고 있다는 신호입니다”라고 지적하더니, “ ‘우리는 더 힘들게 살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패기가 없다’고 타박하는 것은 부분의 사실일지언정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은 외면하는 말입니다”라고 까지 쓴다. <조선일보>가 뭘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란 의미다. 물론 이런 기사는 인터넷에만 올리는 의도도 알 만하다.

‘달관 세대’란 말이 굳이 이 시점에 나온 이유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도 거듭 밝히듯 최근 번역 출간된 일본의 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저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의 영향이다.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된 이 책의 번역본이 2014년 12월에 나온 후 몇몇 한국 언론에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책이 묘사한 현상을 따라할까 우려하는’ 기사를 냈다.

그러한 우려는 한심할 정도로 한가했다. 1990년대에 ‘이지메’는 ‘왕따’로 금세 수입되었지만, 2010년대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한국의 ‘달관 세대’로 오는 것은 현 시점에선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해제를 쓴 오찬호 박사조차 “그나마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유토피아였다. 부럽다”고 적었다는데 ‘사토리 세대’의 상륙을 우려한 이들은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고민해 보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 부분에서도 ‘오지 않은 달관 세대’의 도래를 말한 양치기소년 <조선일보>의 ‘거짓말’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들은 적어도 ‘달관 세대’가 한국에 오는 사회가 지금보다는 낫다는 것을 직관적으로나마 알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을 방문하여 그 나라의 사회 현실을 목도한 지인과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이런 대안을 시도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일본의 대졸 초임 임금이 생각만큼 안 높다. 한국으로 치면 월 150만원 정도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물가를 생각하면 상당히 박한 편인데, 이 정도 일자리는 우리도 여러 기업에서 노동시간을 쪼개어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투였다. 그래서 그에게 “그들은 고용안정이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체로 65세까지 고용안정이 된다”고 답했다.

▲ 사회적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기획은 계속된다. 우리의 '달관'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의 설명을 따른다면, 일본의 젊은이들에겐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정규직’을 포기하고 불안정노동을 택한다면 그 이상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의 젊은이들은 ‘안정성’을 택하여 월수 150만원 정도의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여 월수 300만원 정도로 퇴직하는 길을 가거나, ‘하고 싶은 일’을 택하여 불안정노동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시간 동안 200여만원을 받으면서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물론 일본 사회에서도 이러한 선택지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사회 역시 과거 버블경제 시절에 비해 불안정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이 훨씬 험난해지고 있고 그런 상황이 가중될 거란 진단이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청년들이 오늘을 ‘행복’하다 느끼고 ‘달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적 조건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과연 한국 사회의 청년들 중에선 몇이나 그러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을까?

'사토리 세대' 일본과 '달관 세대' 한국? ‘안락사’와 ‘질식사’의 차이

<조선일보> 특집 기사를 대략 뜯어봐도 해답이 일부 보인다. 이 기사에 나오는 ‘달관 세대’의 대표자들은 200만원대 월급을 받는 중소기업 정규직이거나, 100만원대 월급을 받는 비정규노동자다. ‘달관’의 비법은 긴 노동시간을 피하고 삶의 비용을 낮추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불안정노동으로 적정시간 노동, 100만원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자격증이나 전문기술이 있는 상태로 외주노동을 하고 있는 이, 사교육 종사자 중 일부 정도다. 실제로 기사에서도 논술학원에서 첨삭을 하고 있는 이의 사례가 등장한다. 의사들이 개업을 포기하고 일주일에 하루쯤 ‘페이닥터’를 하며 논다면 ‘달관’이라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세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최저임금이 사실상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임금’인 경우가 많은 한국의 일반적인 불안정노동 시장에서, 저 ‘달관’의 경지에 오르려면 한달에 200여시간을 일하면서 “얼마 일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 하고 싶은 일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정신승리’를 해야만 한다.

‘노동시간이 적은 중소기업 정규직’을 택할 수 있는 이도 마찬가지다. 일단 한국 사회에 그런 일이 실현되는 기업의 숫자가 현저하게 적을 뿐더러, 그걸 택할 수 있는 이들은 대체로 ‘노동시간이 많은 대기업 정규직’에 비벼볼 수 있는 ‘스펙’을 가진 이들이다. 실제로 기사에서 제시되는 사례들도 ‘학벌’의 측면에서 적어도 ‘상위 15%’ 안쪽의 사례로 보인다.

학벌만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상에선 <조선일보> 식 ‘달관 세대’에 나온 사례에 대해 “아무리 계산해봐도 서울에서 저 금액으로 ‘달관’하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식의 푸념이 나온다. <조선일보>가 날조를 했을 가능성은 가급적 배제하고 그들이 가려둔 게 무엇인지나 추론해 보자. 그것은 물론 부모의 재력일 것이다. 적어도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할 필요는 없어야 한다. 어쩌면 ‘날조’란 의혹이 나올 만큼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된 월세도, ‘국가 대신 보증금을 무이자 대출해준 그들 부모님의 은혜의 소산’인지 모른다.

당연히 부모가 여유가 있다면 저임금으로도 ‘달관’이 된다. 그러한 ‘달관’은 그럴 처지가 못 되는 이들에게 ‘폭력’이 되기도 한다. 가령 패션잡지와 같은 업계에선 ‘잡지’의 특성상 대체로 중저임금이지만, ‘패션’이란 영역의 특성상 대체로 ‘부모의 여유’가 있는 이들이 유입된다 한다. 이런 곳에선 때에 따라 임금 체불에 ‘달관’할 수 없는 청년을 회사와 다른 ‘달관자’들이 합심하여 계층적으로 ‘멸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저임금으로 ‘달관’이 되는 이는 취업준비를 오래해도 ‘달관’이 될 게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벌체제는 과거처럼 ‘제한적인 영역에서나마 계층 변동의 기제’이긴커녕 ‘계층 재생산을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됐다. 대기업 사원들을 보면 명문대생들이 다수니 명문대를 들어가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직장들을 보면 월급이 200만원 미만이라도 4대보험만 된다면 원서를 내는 명문대생들이 숱하다. ‘달관’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금 대출이라도 끼고 있을 경우 노동시장 바깥에서 오래 버틸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모님이 서울에 사시면 비용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 한다.

이런 실정에서, 일본의 ‘사토리 세대’에 한국의 ‘달관 세대’를 포개는 행위는 “안락사나 질식사나 똑같다”고 주장하거나, ‘엄연한 질식사를 안락사라 우기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청년실업자들을 향한 “눈높이를 낮춰라”는 기존의 제언에 비해서는 청년들이 의외로 소박한 것에 만족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함의는 있겠는데, <조선일보>만큼도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기성세대에겐 이런 함의마저 기각될 뿐이다.

▲ 한윤형은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기획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3가지 '달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왜 우리는 ‘달관’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는지를 물어야

일본에서 건너온 분석이 전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는 이들은 오히려 ‘현재’를 ‘불행’하다 느끼는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들은 ‘현재’를 ‘행복’하다 여긴다는 어떤 ‘역설’이다. 이 역시 ‘내려가는 사회’의 한 양상일 텐데, 우리가 거기 부합하지 않음은 아마도 일본 사회의 저 분석의 출발인 여론조사부터가 증명할 것이다. KBS 기자 박종훈이 지난 2월 12일에 올린 <대담한 경제> 12편을 보니, 20~34세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 ‘바라는 미래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고 응답한 청년은 23%에 불과한 반면, ‘붕괴, 새로운 시작’이라는 응답이 무려 42%나 나와서 큰 충격을 주었다”고 전하니 말이다.

박종훈 기자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디스토피아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일보> 특집이 가려버린 부분을 드러냈다(물론 KBS의 이러한 보도 역시 인터넷판에 올라온 기사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엄기호 또한 최근 실린 <시사in> 칼럼에서 한 청년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배제와 배제에 따른 무력감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리셋하는 것이 차라리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그것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상상 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한다. ‘달관’이 아닌 ‘리셋’의 욕망.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한 것 같은데 사뭇 다른 결말이다. 우리는 이 간극의 이유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의 청년이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에 ‘현실’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한국의 청년들은 ‘현실’에서도 소소한 쾌락을 누리기 어렵기에 ‘근과거 판타지’를 소환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떤 과거는 지금보단 다소 나았다는 식이다. 이제는 2천년대 초반 학번의 일상도 회고의 대상이 될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국 사회의 흐름상 이러한 ‘근과거 회고’는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만은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잡히지 않고 즐기겠다는 이들과, ‘미래’도 불확실하지만 ‘현재’도 이미 ‘미래’에 저당잡힌 것을 알기에 고개를 들어 과거를 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차이다. 일본에서 ‘달관’은 청년층 일반의 삶의 전략이 되었지만, 한국에선 그것조차 특권이다.

그렇게 된 이유를 노동의 영역에서 찾아본다면 역시 불안정노동 시장의 상황과 정규직노동 시장의 상황으로 나누어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노동의 상황으로 볼 때, 한국 경제는 일본에 비해 훨씬 더 광범위한 저임금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그 필요분의 상당수를 청년세대와 이주노동자로 채우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기성세대는 청년세대가 눈높이를 안 낮춘다 욕하고 청년세대는 이주노동자를 무임승차자라 욕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규직노동 시장의 상황을 본다면 불황을 임금 감소 및 일자리 나누기로 지나친 나라와 정리해고 관철 및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 통치로 지나친 나라의 차이가 보인다. 이 상황에 대해 체제와 보수주의자는 정규직 노조를 욕하지만, 임금 감소 및 일자리 나누기를 거부한 것은 노조의 선택이 아닌 정부와 자본이 적극적으로 택한 길이었다.

그 결과 이 나라엔 과잉노동하면서 선진국 평균보다도 높다는 대졸초임을 받는 정규직 노동자, 과잉노동하면서도 생활임금을 벌지 못하는 불안정노동자, 그리고 백수만이 남게 되었다. 첫 번째 부류 역시 자신들을 ‘꿀단지에 빠진 파리일 뿐’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물론 그 비유에 따른다면 그 뒤의 두 부류는 ‘설탕물단지에 빠진 파리’와 ‘맹물그릇에 빠진 파리’에 불과할 것이다. ‘달관’하기는 어렵고, ‘리셋’에의 욕망만 커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조선일보> 역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고용안정이 보장된 정규직의 노동시간을 반으로 줄이되, 채용인원을 두 배로 늘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청년들이 어떤 상황일 때야 ‘달관’할 수 있는지 실제로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대부분의 기업이 <조선일보>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상당수 실업자와 자영업자들을 다시 노동시장에 유입할 수 있을 것이고 줄어든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의 인상에도 덜 저항하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실험을 할 수 있을까. 실험은 매우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신문산업은 사양산업이고, 종편은 적자인데 어찌 고용안정이 가능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후배’ 기자의 시간을 온전히 점유하고 통제한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지금의 교육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 월급이 반토막이 나면 상대적으로 이직의 가능성이 커져 기자에 대한 통제력이 줄어들고 이번처럼 ‘와꾸’가 안 맞는 기사를 쓰라고 지시할 때 반발을 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이 이와 같은 길을 택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류의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차일피일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미루다가는, 한국 사회는 일본 사회와는 비교도 안 될 수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조선일보>가 그 심각성의 일단이라도 보았다면, 이제는 ‘달관 세대’ 류의 ‘눈가리고 아웅’ 식 말장난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