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그는 ‘선의’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말인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은 정확히 이 의미를 서술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가 선의만으로 되지 않음은 삼척동자도 안다. 느와르의 세계처럼 잔혹무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한국적 풍토에서 정치라고 하는 행위는 선한 의지와 의로운 마음만으론 곤란하다.

그 곤란함이 절절하게 드러난 게 바로 지난 대선이었다. 얼마 전 끝난,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서 박지원 의원은 문재인 의원을 향해 ‘친노 퇴진을 지난 대선에서 말했더라면, 지금 청와대에 있었을 것’이란 취지의 발언을 했다. 내부에서 그를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한 비판이지만, 이 말도 역설적으로 그의 선의를 설명한다. 이 비판에 그는 속수무책이다. 그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선의는 그의 한계이며 동시에 기반이고, 가능성이며 때론 가두리이다.

문재인의 정치력은 어떠한가. 이완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는 문재인 체제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시험대이자, 대선 이후 돌아와 다시 대중 앞에 선 문재인이란 정치인의 달라진 얼굴을 확인하는 경연장이었다. 표결에 참가하며 의회 민주주의 질서를 지켰고, 결과적으로 패배했더라도 내용적으론 승리했으니 그의 정치력은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을 까. 그런데 이 문장도 좀 묘하지 않은가. 맞다. 이건 그 자체로 또 그에 대한 설명이다. 선의란 그런 것이 아닐까. 결과를 내어주고도 과정을 위로하는 마법을 부리는 정신승리.

어쩌면 앞으로 계속된 문재인의 패배를 목격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총리 인준 과정에서 ‘호남 총리론’을 말하고, ‘공동 여론조사’를 언급했다. ‘호남 총리론’은 ‘충청 총리 훼방론’으로 되치기를 당했고, ‘공동 여론조사’는 본회의 보이콧 불가의 외통수로 당 전체를 몰아넣었다. 물론, 그는 선의였을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선 어떤 정권도 실패해선 안 된단 선의가 TK 독식 정권을 향해 ‘호남 총리’를 권유한 배경이었을 것이다. 민심을 이반하는 정치적 결정은 안 된다는 선의가 ‘공동 여론조사’라는 생경한 제안을 했던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의는 일말도 관철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당했다. 호남 총리론은 종편에서 내내 조리돌림을 당하더니 충청향우회 회장에게 직격당했고, 공동 여론조사는 갓 원내대표에 취임한 여당 지도부에게 힐난 받았다. 선의를 악의로 갚는 저 무리들을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 인격적으로 고매한 정치인의 아량을 이해하지 못하는 범인들의 우를 나무라야 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문재인의 정치가 아직도 ‘노무현의 좋았던 벗’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고, 일찍 붕괴되고 있는 정권의 다음이 그와 그가 속한 정당의 몫이 될 수도 있음을 감안하면 그는 더 달라져야 하고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행여, 어떤 이들은 끝내 그의 선의가 정치의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으리란 낭만적 믿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주변의 어떤 비서관들이 그럴 수도 있고, 그를 떠받히고 있는 많은 지지자들도 그럴 수 있다. 그의 친구 노무현도 ‘바보’라는 소리를 듣던 당대의 놀림감이었지만, 끝내 미래를 쟁취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황소걸음을 걷는 것과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리는 것은 경로의 양상이 비슷할 수 있어도 한참 다른 행위다. 노무현의 시대는 그를 지지하는 소수의 팬덤이 진정성으로 다수의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며 여론을 견인할 수 있었던 언론 지형의 시절이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를 경멸하는 소수의 정치 평론가들이 정파성을 공론으로 위장해 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여론을 조정할 수 있는 종편 중심의 언론 지형이다. 그의 선의는 매번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이 될 것이다.

▲ 문재인과 이완구, 이번 설에 가장 많이 회자될 그리고 가장 격정적으로 토론 될 두 인물이다. 문재인 같은 정치와 이완구 같은 인생이 저 여의도에 벌써 십 수년 째 뒤엉켜 공수를 교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사람도 있다. 선과 악이 모호하다. 다만, 모두가 그처럼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시골에서 태어나 출세하겠단 의지로 스물넷에 공무원이 되고,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면 그게 설령 삼청교육대에 업무지원을 하는 것이라도 기꺼이 수족이 되었던 사람. 공적 책임감이 충만해서 그랬다고 설명할 순 없는 게, 그 공무를 보며 깨알같이 부동산 정보를 수집하고, 칼같이 갈아탈 타이밍을 따져 사적 재산을 증식해온 사람. 대를 이어 병역이 석연치 않고,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한 과정도 뭔가 꺼림칙한 사람. 그래도 출세한 사람. 출세해서는 언론과 짬짜미하고, 표현의 자유와 정언유착 형제애를 혼동해 과시하는 사람.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지역감정을 붙잡고 의회 민주주의를 봉건영주 수호 경연으로 또 퇴행시킨 사람. 바로 그 사람, 이완구 신임 총리다.

총리 지명 직후, 대선 주자로까지 격상됐던 위상은 간데없지만 그는 어찌됐든 고난 끝에 총리가 됐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뽑힌 가장 강력한 여당이 사활적 총력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커트라인을 7표 넘는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낙마한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다. 하여간 됐다는 게 중요하단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청와대 내부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그에 앞서 낙마한 안대희, 문창극 후보자도 여당이 이 정도 뚝심과 배포를 갖고 지원해줬다면 아마도 낙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천운을 타고 난 것이다. 인사 청문 과정을 보며, 그의 인생관이 아마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격언마냥 정당한 방법을 경시하더라고 결과가 좋으면 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는데 ‘삼청동’에는 어쨌든 안착했다.

그는 이제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난국이 된 정국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환상 속의 그 이름, ‘책임 총리’에 그는 부합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모르지만 어려워 보인다. 물론, 난고를 딛고 살아 온 그를 대통령이 특별히 아껴줄 수도 있다. 대통령의 신임으로 '책임'여부를 따진다면 불가능하지만도 않다. 하지만 이 신임 총리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그와 그의 임명권자가 행하는 정치는 그런 낭만에 기댄 무엇이 아니다. 여론이 버린 총리, 여당 내부에서도 비토가 드러난 총리는 미래를 도모할 수 없다. 그를 뽑아 든 정치적 맥락은 이미 박살났다. 그의 존재로 여당의 차기 주자들을 관리, 조율하겠단 계획은 벌써 수포가 됐고, 충청을 점해 미래를 다진단 야심도 억지 ‘충청 총리’ 만들기가 조기에 작동하며 일회용 카드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염려스러운 건, 가뜩이나 먹칠인 이 정부의 정체성에 그가 탁색을 더했단 점이다. 그의 인생 여정이 곧 이 정부의 권력자, 박근혜 휘하의 실세들이 세상을 살아온 방식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단 점은 보수정치 세력 전체에게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건적 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그건 지난 정부에서도 충분히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시대가 열리지 않았느냐고. 보수 우위의 사회적 역학 구도가 확실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이긴다’는 메시지가 더 확연해보이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박근혜 정부는 52:48의 박빙 승부를 통해 탄생했다. 가장 확실한 주자로 5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막 부상했던 문재인을 만나 최악의 고전을 경험했다. 지금은 보수정권의 피로감이 극을 향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계 인사들은 “보수진보를 떠나 나라가 정말 걱정이다”고 말한다. 우리 편이라 찍어주긴 했지만 정부의 무능이 사회 전체의 말단까지 마비 증상을 앓게 한단 지적이다. 그건 누가 뭐래도 이제 이 정부와 지난 정부의 책임이다. 왜 이렇게 됐느냐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복잡하다. 하지만, 가장 간단히 호소하는 방법이 생겼다. 가리키면 된다. 저기 저 저런 사람이 총리를 하지 않느냐고.

문재인과 이완구, 이번 설 명절에 가장 많이 회자될 그리고 가장 격정적으로 토론될 두 문제적 인물이다. 문재인 같은 정치와 이완구 같은 인생이 저 여의도에 벌써 십 수년째 뒤엉켜 공수를 교대하고 있다. 진보적 관점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보수 양당이라고 부른다면, 문재인과 이완구는 정확하게 그 두 집단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표식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선의’가 승리하는 것만이 이 지긋지긋한 부조리의 세상을 끝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려면 유능해야 한다. 상대의 부조리에 대안으로만 존재하는 정치는 끝내 그 부조리를 해체하는 권력까지를 쟁취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완구는 마지막이어야 한다. 장삼이사들이 언제까지 당대의 권력자들을 말하며 ‘부패·부정·부조리’ 같은 부당함을 울분으로 삼켜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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