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지만, 상담을 요청드립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직 어려서 조심스럽지만, 상담을 요청드립니다”고 적어 보냈다. ‘조심스럽’이란 표현에서 확실히 뭔가 비감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녀석이 밥을 먹고 생활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특정한 행동들의 부진함을 걱정했다. 어린이집에서 녀석은 집에서와는 달리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흔드는 아이였다. 혼자서 밥을 먹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제 막 5살이 된 아들. 나이는 5살이지만, 생일이 늦어 이제 39개월이 됐다. 같은 반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 비해 많게는 8개월가량 늦는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돌아온 아내는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담한 아내의 말을 들으며, 여러 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입으로 뱉진 않았다. 아직 어리다고, 별 문제가 아니라고, 모든 아이가 똑같은 행동을 모두 그럴싸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고 다짐하듯 서로 위안할 뿐이었다.

녀석은 서울에서 맞벌이하는 부부가 키우는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사회 문화적 부조리에 아낌없이 노출된 육아환경을 갖고 있다. 월수금은 외할머니가, 화목은 친할머니가 녀석을 돌본다. 교외로 이사했던 친할머니는 육아를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차분하고 내향적인 성향의 외할머니와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의 친할머니 사이를 녀석은 매일 오갔다.

이 조건들이 녀석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어떤 정서적 반응과 성격 형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는 행동으로 말한다니 몸을 흔드는 것은 분명,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당장에 알아들을 순 없다. 그저 별 탈 없이 자라고 있으니 언제나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할 뿐이다. 녀석의 머리와 마음 어딘가에 육아 형태의 혼란에 따른 기록이 분명 남을 테지만, 그게 부디 많은 사랑을 받았단 긍정적 신호로 기록되길 기원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기원마저 매일 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 서울이란 장소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맞벌이 부부의 일상이다.

▲ 인천 어린이집 가해 교사가 긴급 체포됐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선 구속 여부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사건이 워낙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 법원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있다. ⓒ연합뉴스

충격과 공포로 범벅이 된 그 어린이집의 폭행

인천에서 벌어진 어린이집 폭행 동영상을 조금 늦게 봤다. 차마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활자로 된 해설만 읽는데도 현기증이 일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다른 기자는 일부러 ‘직시’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결국, 그 동영상을 봤다. 정지시켰다가 다시 봤다. 녀석의 동영상과 겹쳐지며, 극단적 무력감마저 들었다. 녀석을 어린이집에 두고 나와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건 그렇지 않건 함께 ‘문명’을 이뤄가는 공동체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 영상을 접한 반응 역시 철저히 거기에 맞춰졌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보게 된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어쩌면 나에게 올지도 모르리란 공포. 분노와 공포의 범벅 속에서 사건은 삽시간에 퍼졌고, 그 동영상의 충격에 최대치의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사회의 윤리성은 확인되고 있다. 그 선생님의 신상은 확실하게 털렸고, 무릎을 꿇은 어린이집 원장의 초췌한 꼴도 확인 됐다. 인천경찰청장은 “폐쇄시킬 각오로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하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세월호 이후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16일자 주요 일간지들은 그 소식을 1면을 포함해 비중 있게 다뤘다.

신속하게 이뤄진 마녀의 처형, 그리고 무엇이 남을까

마녀가 처형됐으니 이제 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마녀 프레임’(자음과 모음)을 쓴 이택광은 그 책에 이렇게 적었다. “마녀는 언제 어디서나 부활한다. 우리가 모두 마녀이자 동시에 마녀 심판자다” 물론, 이택광이 규명하고자 한 ‘마녀’ 개념과 지금 이 사건을 둘러싼 반응의 연관성을 논하는 것은 정교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희생양을 통해 ‘윤리의 공동체’를 이루고 나선 재빨리 사건의 본질을 덮어버리곤 했단 점은 그러해 보인다. 이 사건의 충격과 공포가 다시 짚어져야 할 필요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단죄하는 것을 넘어 안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를 찾아야 한다.

보육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많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보육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아졌다. 보육 정책은, 육아를 둘러싼 환경은 이룰 말할 수 없는 혼돈과 난맥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지금 직시하는 게 한가하다고 생각하는지 이번 사건을 철저히 개별화해 접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보육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늘어나며, 어린이집이 난립됐고, 그 부작용으로 아동 학대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빗나간 지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해법으로는 한결같이 ‘감시 강화’와 ‘처벌 강화’를 주문하고 있다. 엄마 기자의 시선을 빌려, 왜 어린이집 CCTV에 대해 이처럼 까다롭게 구느냐고 힐난한 언론까지 있었다.

단기적인 처방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벌백계의 의지를 보여주고, 감시의 강도를 높여 또 다른 사례들을 찾아내 드잡이를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잡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국 4만여 개에 이르는 어린이집의 질적 개선을 촉구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까. 인천 어린이집의 그 교사는 매우 예외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 예외성을 처벌 강화와 감시 강화로 모두 적발할 수 있을가.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 정책적으로 따져 봐도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린이집의 문제는 결국, 보육 정책의 국가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궁극적 해법이 되기 어렵다.

보육 정책의 국가적 패러다임 바꾸지 않는 한, 사고는 계속 된다

질 낮은 어린이집에 자격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교사가 근무하는 배경은 결국, 어린이집으로 대변되는 보육 정책이 여전히 국가적 행정이 아닌 민간의 영역에서 다뤄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어린이집이 4만개 가까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영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국가가 일부 비용을 지원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이집은 가정 보육이 불가능한 아이를 양육하는 형태로 개인적 선택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집은 더이상 '직장맘'이 있는 가정만 보내는 시설이 아니다. 이제 누구라도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그건 여전히 개인의 상황으로 치부된다. 어린이집의 위상을 지금과 같이 두어서는 문제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아동학대를 학부모가 발견해 사법당국에 신고해 사후적으로만 관리할 수 있는 체계에선 같은 문제가 계속 사후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린이집으로 대변되는 보육 체계 자체를 공영화하고, 이에 대한 관리 책임을 정확히 국가가 부담하며 이를 시민사회가 감시하는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무상 보육’이 아닌 ‘사회적 보육’이 쟁점이 되어야 한다. ‘무상 보육’은 ‘무상 급식’과 함께 지난 몇 번의 전국단위 선거를 주도한 이슈였다. 그 결과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많이 감소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를 부담스럽다 하고, 국가 재정에 대한 책임이 약한 야당은 계속 비용의 상대성을 강조하며 문제를 이슈화하고 했다. 하지만 ‘무상’을 둘러싼 대립 전선은 전혀 근본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왜곡된 프레임이다.

보수 세력은 육아 정책에 ‘무상’이 붙어 있는 것을 물어뜯어 왔지만, 실제 그 비용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도 없고, 아무리 비용을 늘린들 한국 사회의 다른 특성과 맞물리며 절대 키워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호명에 갇히게 되면서 보다 급진적인 보육 정책의 추진과 시스템 구축이 방해받고 있다. 무엇이 보편적이어야 하는 가의 근본을 짚지 못한 채 당장의 논쟁만 해온 결과다.

똑같이 지원하는 ‘보편성’아닌 원하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편성’ 구축해야

예컨대, 보육 정책에 있어 가장 완성도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는 스웨덴의 경우 보육 시설 관리, 보육 교사 양성 등 보육과 관련한 모든 업무를 국가가 관장하며, 이를 감시하는 국가적 위원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보육은 철저하게 국가의 책임이다. 보육 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로 모든 노동자들이 ‘육아부담금’을 납부하며, 자녀를 둔 모든 가정은 원하면 모두가 똑같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공보육 체계를 갖추고 있다. 우리처럼 개개인에게 얼마나 똑같이 지원 하는가에서 ‘보편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가를 사회에 맡길 수 있다는 측면의 ‘보편성’을 구축한 것이다.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꼬박 1년 6개월을 기다렸다. 처음 받았던 대기 순번은 100번대가 넘었다. 내년에는 유치원에 보내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유치원 재수도 흔해진게 한국 사회다. 정부는 매달 20여만 원의 어린이집 지원금을 준다. 어린이집은 ‘특별 활동비’로 몇 만원을 더 받는다. 물론, 매달 들어가는 그 비용은 부담스런 금액이다. 하지만 그 비용이 육아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시설을 쉽게 찾을 수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그 시설의 운영 실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그리고 만족도가 높은 정책일 것이다.

너무 원대한 얘기이고, 당장 시급한 문제들과는 또 별개인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상투적 비유겠지만, 4대강에 녹아난 돈이나 허울뿐인 창조경제를 위한 예산 중 일부의 일부만 헐어도 당장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생각의 전환이고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아동 학대를 사회가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이냐는 의지다. CCTV를 늘린들 지금처럼 어린이집 선택을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부모들이 원하는 건 내 아이가 맡는 걸 사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충분한 관심과 돌봄을 받을 수 있길 원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보육 체계가 오더라도 어린이집에서 몸을 흔드는 녀석의 모습은 결국 양육자의 고민으로 남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고민과 끊임없이 경주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39개월째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비용으로 해결되지 않을 고민이고, 감시와는 상관없는 보편적 마음이다. 그 고민에 누군가 폭력을 가하지 않는 것. 양육자들의 마음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더디더라도 찾는 것. 그것만이 우리 아이가 비극적인 피해자가 되지 않길 기원하는 부모들의 바람에 복무하는 국가의 고민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은 또 되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놀라기만 할 순 없다. 느리더라도 이미 그걸 개선해 갈 방법이 있다면, 이번에는 화만 내고 끝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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