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극장가는 UIP, 워너, 20세기 폭스, 소니 컬럼비아, 브에나비스타 등의 직배사를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들이 성수기 대목의 패권을 쥐고 있었고, 성룡, 이연걸로 대표되는 홍콩영화들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국내영화는 스크린 쿼터제라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나 홍콩영화들에 당당히 작품의 경쟁력으로 맞설 수 있는 한국영화들이 근근이 눈에 띄며, 한국영화의 파이를 차근차근 넓혀 주었다. 그런 한국영화들의 중심에 한석규란 배우가 자리하고 있었다.

로맨스 코미디 ('닥터봉'), SF판타지 ('은행나무 침대'), 블랙코미디 ('넘버3'), 잔잔한 감동이 넘쳐나는 워킹타이틀류의 로맨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작품성이 돋보이는 수작 ('초록 물고기') 그리고 할리우드 부럽지 않은 블록버스터 ('쉬리')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하며 한석규가 출연한 영화는 1990년대 충무로의 확실한 흥행 보증수표였다.

만약 그 당시에 지금처럼 대규모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한석규는 일찌감치 천만배우에 등극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속된 말로 외화에 쫄리던 시절에 극장에서 한국영화 보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임을 느끼게 해준 몇 안 되는 배우가 다름 아닌 한석규였다. 1990년대 극장가의 한국영화의 위상은 국내 영화 점유율이 50%를 손쉽게 넘나드는 요즘에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희미한 추억이 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석규의 티켓파워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2000년대 들어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들 중 나름 흥행에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영화는 2006년의 '음란서생'과 2013년의 '베를린' 정도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력은 늘 호평을 받는다. 특히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보여준 그의 눈부신 연기내공은 그의 전성시대를 접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도 한석규란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미스터리 팩션 '뿌리깊은 나무'는 탄탄한 스토리와 세종 역을 맡은 한석규의 신들린 연기력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에 힘을 얻은 것인지 한석규는 2014년 드라마 '비밀의 문'과 영화 '상의원'을 통해 대중에게 다시 선을 보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사극이고 팩션 장르였다.

사실 드라마 출연을 자주 하지 않던 그였기에 '비밀의 문' 출연은 다소 예외로 느껴지기도 했다. 영조 역할을 맡은 그의 연기는 여전히 빛을 발했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와 달리 긴장감이 떨어지는 스토리 라인으로 인해 '비밀의 문'은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 얼마 안 있어 개봉한 영화 '상의원'을 통해 한석규는 또 다른 사극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 '상의원'은 궁중의상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전 사극에서 다뤄보지 않았던 참신한 소재이다. 참신한 소재를 다룬 대표적인 사극을 꼽는다면 드라마 '대장금'(음식)과 영화 '왕의 남자'(광대놀이 공연) 등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역사와 픽션을 적절히 가미하여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하였다.

영화 '상의원'에서 한석규는 어릴 적부터 묵묵히 옷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여 마침내 왕의 의복을 제작하는 상의원의 최고 위치인 어침장이자, 6개월 뒤면 양반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조돌석 역할을 맡았다. 다소 고지식한 면모의 조돌석과 달리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옷을 만들어내는 자유분방하고 천재적인 재능을 보유한 이공진(고수)이 나타나면서 조돌석은 자신의 지위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갈등구도가 드러날 수 있는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조돌석과 이공진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긴장감을 자아내기보다는 느슨하면서도 일정 간격으로 거리를 두는 관계를 보인다. 철저하게 대비되는 캐릭터임에도 조돌석(한석규)과 이공진(고수)과의 관계에서는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이러니가 빚어진다.

또 다른 갈등관계인 왕(유연석)과 왕비(박신혜)간의 갈등요인도 그다지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배경이 도무지 언제인지 모르는 설정은 드라마 '해를 품은 달'과 유사하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과 달리 영화 '상의원' 속 왕의 고뇌와 왕비의 고민은 굳이 저렇게 심각해져야 하나 의문을 품게 만든다. 어릴 적부터 선왕이자 자신의 친형한테 가졌던 콤플렉스로 인해 왕비와 단 한번도 침상을 같이 쓰지 않았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실권을 쥐고 있는 영의정에 의해 계획적으로 후궁이 들어오려는 설정은 이미 여타 사극에서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참신한 소재를 제대로 살려내지도 못하면서 정작 갈등구조는 이미 기존 사극에서 단골메뉴로 써오던 고리타분함을 도입하다 보니 영화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게 된다.

영화 초반부는 코믹한 장면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면서 이공진의 뛰어난 옷 만드는 솜씨를 강조하려고 하는데, 아무리 퓨전사극이라지만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보는 듯한 억지스러운 설정은 영화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다. 한석규, 고수, 박신혜, 유연석, 마동석, 그리고 요즘 한창 조연대세로 떠오르는 배성우도 비록 비중은 작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문제는 기본적인 시나리오 자체가 몰입을 유도하지 못하고 배우들을 각자 따로 놀게 만드는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단 점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원석 감독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심혈을 기울여 야심차게 내놓았던 데뷔작 '남자사용설명서'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이번 작품에선 투자자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연출의 제약과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흥행을 생각했다면 좀 더 세밀한 전개가 필요했을 텐데 그 좋은 배우들의 연기력을 살려내지 못한 어설픈 전개와 영화 초반부의 억지스런 유머코드는 과연 흥행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을 했을까란 생각이 들게 한다.

개인적으로 한석규라는 배우를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영화 '상의원'은 그가 이전에 보여준 작품을 선택하는 선구안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라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 작품이었다. 인물간의 갈등, 개인적인 고뇌가 이토록 설득력 없이 느껴진 영화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배우들은 최선을 다했는데 조악한 스토리라인이 아쉬움만 잔뜩 안겨줬다. 결국 이 영화를 보고 남은 건 지극히 평범하지만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교훈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스토리와 연출이 받쳐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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