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정권의 보도통제, 언론인 연행 등에 항의하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거리로 내몰린 <동아일보> 해직언론인들이 39년 만에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에게 국가배상의 길이 열렸다’는 취지의 기사가 쏟아졌고 소송 당사자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 김종철, 이하 동아투위)에게는 축하 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 하지만 동아투위는 “사실상 전원이 패소한 판결”이라며 “대법원이 꼼수를 부리고 있다”라고 강력 비판했다. 무슨 일일까.

대법원 2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지난 24일 <동아일보> 해직언론인 134명이 낸 1975년 광고탄압 및 대량해직사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 ‘시효가 소멸됐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지난 24일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결정을 한 상황에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라며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있는 <동아일보> 언론인들 (사진=동아투위)

진실화해위는 2008년 10월 29일, <동아일보> 사태를 중앙정보부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명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게 <동아일보> 및 <동아일보> 해직언론인에 사과할 것, 해직언론인들의 언론자유 수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이들의 피해 회복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민주화시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해직언론인 구제조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1, 2심 역시 “당시 정부가 유신체제의 언론통제에 저항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펼친 <동아일보> 언론인들을 해임시키기 위해 광고탄압을 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정부는 원고들이 겪었을 고통에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면서도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는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었으므로 5년 청구시효가 만료됐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이번에 나온 3심 판결은 재판부가 명시한 소멸시효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다시 한 번 명시했다. 하지만 동아투위는 관련 소송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선고를 내린 점, 원고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다는 점, 그나마 배상 여부에 대해서도 <동아일보>가 국가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 결과를 보고 청구권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한 점을 들어 ‘합법을 가장한 꼼수 판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134명 중 원고로 인정된 사람은 14명 뿐
‘손배청구권 성립’ 여부도 확정하지 않아

대법원은 134명의 원고 가운데 권근술, 김동현, 김진홍, 김태진, 김학천, 성유보, 송준오, 오정환, 이부영, 이종대, 임채정, 조학래, 허육, 황의방 등 14명에 대해서만 국가가 배상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해 달라고 요구한 50명만을 원고로 인정한 가운데,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수령한 36명을 제외시킨 결과다. 이전 재판부가 원고 전원의 청구권을 인정한 것과 달리, 대법원은 생활지원금을 수령한 원고들의 손배 청구소를 모두 각하한 것이다.

대법원은 민주화운동법 제18조 2항을 근거로 이미 보상금을 수령한 이들은 이번 소송의 원고가 될 수 없다고 보았으나, 헌법재판소에서 해당 법의 위헌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아 법적 판단 문제도 아직 남아 있다.

▲ 29일 오전 10시 30분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문영희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2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대법 재판부는 다수 원고에 대해 아무 이유 설명도 없이 상고를 기각한다면서 2006년 진실화해위에 진실을 밝혀달라고 서명한 동아투위 회원 50명에 대해서만 판결했고, 36명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며 “지원금을 받지 못한 14명만 파기환송해서 2심으로 돌려보낸 것은 명백한 사기”라고 꼬집었다.

대법원은 또한 “<동아일보>가 피고(국가)를 상대로 이 사건 진실규명결정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해 소송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원심은 피고가 <동아일보>에게 광고탄압을 하고 원고 등의 해직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에 관해 나아가 심리,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에서 인정한 국가의 배상 책임 역시 <동아일보>가 진실화해위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낸 소송결과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종철 위원장은 “진실화해위가 1975년 3월 17일 기자들을 몰아낸 것,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광고탄압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도 <동아일보>는 이 결정을 뒤엎으려고 노력했고 1, 2심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 국가배상 관련한 그간 대법원 판결을 볼 때 상식적으로 지금의 대법원이 상고심에서 파기환송을 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지적했다.

김종철 위원장은 “1, 2심 재판부가 원고로 인정한 사람들을 ‘나머지 워고들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한마디로 아예 배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와 관련해 대법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지는 동아투위 법무팀과 다시 한 번 검토할 계획”이라며 “지난 40년 동안 싸웠듯이 온갖 수단과 투쟁방법을 동원해서 앞으로도 의연하게 이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강성남 위원장은 “이번 문제는 동아투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화해위를 거치면서 숨어있던 현대사가 드러났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진실화해위에서 밝힌 현대사 사실을 덮거나 왜곡하기 위한 꾸준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며 “국가배상 문제가 연이어 왜곡되고 좌절되는 상황에 대해 끝까지 주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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