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 의혹’이 불거지는 가운데 보수언론들은 그야말로 어쩔줄 모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애초 사건 직후 이를 ‘문건 유출’ 정도의 수준에서 축소 보도할 태세였던 <조선일보>는 <중앙일보>가 지난 1일 정윤회 씨 인터뷰를 1면에 실으면서 이것이 심상치 않은 사태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중앙일보>의 보도 이튿날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인터뷰를 1면 배치해 <중앙일보>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정윤회 씨의 주장을 깨뜨렸다. <조선일보>의 일격(?)으로 <중앙일보>는 정윤회 씨의 주장을 크로스체크 없이 일방적으로 보도한 셈이 됐다.

▲ 중앙일보 1일자 1면과 사실상 이를 반박한 조선일보 2일자 1면.

중아일보의 '선공', 이어진 조선일보의 '반격'...정윤회-박지만 갈등 굳혀

두 신문은 문건의 유출 과정을 두고도 서로 다른 관점의 보도를 이어갔다. <조선일보>는 박관천 경정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갔고 <중앙일보>는 제3자가 저지른 짓이라는 박관천 경정의 주장에 방점을 찍었다. <중앙일보>가 정윤회 씨 주장을 몇 차례 더 전면에 내세우고 <조선일보>가 의도치않게 박지만 EG회장 측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며 정윤회 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가운데 애초 정권의 입장에서 관리되고 정리돼야 할 성질의 것이었던 이 사건은 정윤회-박지만 갈등으로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그간 적극적 대응을 자제해왔던 <동아일보> 역시 논란이 거의 열흘에 가깝게 이어지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정조준하며 언란(言亂)에 가세했다. 청와대가 조응천 전 비서관을 비롯한 ‘7인모임’의 존재를 언급하며 사실상 박지만 회장을 압박하는 것 역시 더 이상 상황을 요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관리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더 이상 박근혜 정권이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보수언론들은 이제까지 권력에 안주하던 태도를 버리고 너도 나도 정권을 향한 비판에 가세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그간 읊은 레파토리는 거의 ‘야당’을 방불케 한다. 정윤회, 박지만에 대한 검찰의 성역없는 수사,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의 축출,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 변화, 여기에 “무소신·무기력·무책임한 정권이 앞으로도 3년 넘게 이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는 한탄까지 등장했다.

1등 신문의 '감각' 보여주는 조선일보, 여당향한 일관된 '메시지'

흔히 ‘조중동’으로 묶어 부르지만 1등 신문은 1등을 하는 이유가 있다. <조선일보>는 그 와중에도 몇 차례에 걸쳐 여당은 왜 가만히 있느냐는 호통을 쳤다. <조선일보>는 지난 5일 <‘정윤회 문건’, 꿀 먹은 여당>이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지난 8일 <대통령 앞에선 입 닫은 與, 이러니 ‘靑 하도급업체’ 말 듣는 것>, 12일 <졸장부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여당의 과도한 순종적 태도를 반복해서 지적했다.

물론 이 시점에 여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다고 해서 정윤회-박지만 갈등이 수습되고 ‘문고리 3인방’들의 어깨에 힘이 빠지며 박근혜 대통령이 올바른 국정운영 방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사태로 여당마저 청와대를 들이받게 되면 국정운영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나 깨나 권력의 향방을 고민하는 <조선일보>가 계속 여당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조선일보 12일자 칼럼.

새누리당 차기 주자 싸잡아 '졸장부' 질타, '구애 몸짓으로 점지만 기다린다'

이는 앞서 예로 든 12일 최보식 선임기자가 쓴 <졸장부 시대>라는 칼럼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최보식 기자는 이 칼럼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찝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최보식 기자는 이들을 두고 “국민의 신임을 얻어 국민 속에서 일어서려는 게 아니라 유별난 구애의 몸짓으로 대통령의 점지만 기다리려고 한다. 아무리 ‘졸장부 시대’이지만 새누리당이 이들을 내세워 재집권하려고 들까 봐 식은땀이 날 정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대목이야 말로 <조선일보>가 무엇에 긴장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현재 ‘차기 대권주자’를 논하면 압도적으로 야권 인사들이 많다. 여론조사에서 의미있는 지지율을 기록하는 여당 소속 인사래봐야 김무성 대표 정도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가 과연 차기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장삼이사에 속하는 일반인들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 국면에서 청와대에 눌려 기를 못 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어 김무성 대표의 미래는 더더욱 밝지 않은 상황이다. 김문수 전 도지사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이완구 원내대표.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의 남은 3년 우려하는 조선일보...결국, 하고 싶은 말은 '정권 재창출'

앞서 썼듯이 <조선일보>는 12일 사설에서 “무소신·무기력·무책임한 정권이 앞으로도 3년 넘게 이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고 썼다. 위의 맥락을 고려하면 이들이 느끼는 ‘걱정스러움’은 단지 박근혜 정권이 국정운영을 못한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 큰 걱정은 3년 이후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10년 만에 또다시 야당에 정권을 내줄 수야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 종편까지 소유해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 수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그렇잖아도 신문의 위기인데 뭐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야당에 정권을 내주지 않으려면 지금 ‘차기 대권주자’가 있어야 한다. 이 대권주자가 이런 국면에 대통령을 들이받고 최소한의 입바른 소리라도 하면서 움직여야 <조선일보>와 같은 존재들은 안심할 수 있다. 물론 집권 2년차에 벌써부터 차기 대권주자가 대통령의 다리를 절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최소한 오늘 판단하는 박근혜 정권의 현재는 정치적으로는 ‘레임덕’에 빠질만한 수준이다. ‘무소신·무기력·무책임’이라는 수사는 이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런 태도에는 민심이 심상찮다는 판단 역시 깔려있을 것이다. 최근의 다수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대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소위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불렸던 적극적 지지층의 턱 밑까지 위기가 치고 올라온 것이다. 핵심 지지층까지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을 정리해서 여당이 숨쉴 틈을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정서적 아킬레스건 모두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멘붕'

물론 <조선일보>가 일종의 ‘정권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금 강하게 원칙론을 제기해서 나중에 문제가 수습된 이후 더 큰 발언권을 획득하겠다는 계산이라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태가 쉽게 끝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정윤회 씨와 박지만 회장은 각기 대통령의 정치적, 정서적 아킬레스건이다.

정윤회 씨는 박근혜 대통령을 오래도록 따라다닌 ‘비선 의혹’의 당사자다. 소위 세월호 정국에서 ‘7시간’ 문제 역시 이 의혹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은 산케이 신문을 고발하는 것 외에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박지만 회장은 말할 것도 없다. 대통령에게 박지만 회장은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피붙이다. 대선 기간 소위 저축은행 비리와 박지만 회장의 연관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박근혜 당시 후보는 소위 ‘레이저’를 쏘며 아니라면 아닌 줄 알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 두 사람이 수면 위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대통령이 ‘큰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선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조선일보>는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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