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 너무나도 행복했던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는…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행에 불행이 겹쳐지는 것보다 더 힘든 건 행복에게 버림당해 불행으로 잠식당하는 순간일 것이다. 드라마 불모지에 이어 예능 불모지이기도 했던 2014년에 예능 꿈나무의 신성으로 떠올라 국내 톱스타 이상의 사랑과 부를 누렸던 터키인 에네스 카야.

애칭이었던 ‘터키 유생’ ‘터키 출신의 선비’가 그의 언행불일치를 비아냥대는 용도로 밖에 쓰이지 않는 이 시점에, 에네스 카야를 꾸짖으면서도 피해자의 항의를 ‘오해’라 정정하고 급기야 남편을 용서하기로 한 아내의 호소문은 불편하면서도 서글펐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 너무나도 행복했던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한탄이, 그녀가 말하는 ‘가족’이, 남편을 놓을 수 없는 이유임이 서글펐으니까.

방송인 에네스 카야가 유부남인 사실을 숨긴 채 지속적으로 한국 여성들을 유혹해왔다는 폭로가 퍼져나갔다. 이에 가까스로 용기를 낸 피해자는 다수였고 그들의 증언과 증거는 매일처럼 갱신되고 있다. 에네스 카야는 ‘터키 유생’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인스턴트식 가벼운 연애를 경박하다 꾸짖었던 사람이고, 그 이미지를 이율배반하는 폭로의 여파 역시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네스 카야는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속속들이 밝혀지는 증언들을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은 사실이나 총각 행세를 한 적은 없다.’는 에네스카야의 주장을 돌려 말하자면 피해 여성 또한 알고서 불륜했다는 주장이 된다. 피해자와 주고받은 메시지의 수위를 돌이켜 볼 때 정신적 불륜의 책임만큼은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이 일부 사실이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밝힌 에네스 카야의 이면은 우리가 아는 사람과 너무도 다른 행보를 보여 충격을 준다. 유부남의 신분으로 외간 여자와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터키 유생이라니. 하룻밤 끓다 마는 인스턴트식 연애를 경멸해 ‘썸’이라는 단어를 부정한다던 그가 오히려 자신이 꾸짖고 혐오했던 인간형의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가 주장했던 모든 것들이 그저 방송용으로 만든 유니콘 드림일 뿐이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봐도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나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에네스 카야 사건이 만든 다수의 피해자는 그의 이미지에 홀렸다 인간적 배신감에 허탈해 할 우리의 대중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통증이 그녀들만 할까 싶다. 에네스 카야 사건은 무수한 피해자를 낳았고 그 중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피해 여성과 그의 부인은 양 극단의 이념에서 아파하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카야를 심판하려 하고 후자는 에네스를 용서했다고 한다. 11일 오전, 에네스 카야의 부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한 장문의 호소문은 분노와 원망의 단계를 거쳐 용서에 도달했던,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내의 심경을 처절하게 나열하고 있었다.

<저는 아내이기 전에 여자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글도 다 읽었고… 소름끼치는 악플도 다 읽었습니다. 하나하나 사실여부를 추궁했고… 세상에서 가장 독한 말로 남편의 마음을 할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아내이기 전에 여자라고.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내 남자가 또 다른 여자를 탐했다는 폭로를 견딜 수 없어 남편을 원망하고 독한 말로 할퀴기도 했다던 일련의 시간들을 밝히며 부인은 ‘이런 상황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짐작하기 힘든 고통’이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남편에게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에네스 카야의 몫이라고 밝히면서도 결론은 심판 아닌 용서로 끝맺음했다. ‘그래도.. 저는 이번 잘못들을 용서하고 더 잘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오직 시청률을 위해서인가요? 저희 가족 모두를 한국에서 쫓아낸 다음에야 멈추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이혼녀가 되고, 애기가 아빠 없이 자란 뒤에 멈추실 건가요? 한밤에는 시청률이 중요하지만 제게는 가족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발 부탁드리는 겁니다. 카메라는 무섭구요… 모르는 사람이 집 문을 두드리고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건 더 무섭습니다.>

에네스 카야를 ‘용서’하기로 한 아내에게 더 이상 남편은 그녀의 적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에네스 카야의 적극적인 우방이자 또한 보디가드로 나서 그를 지켜주려 발버둥 쳤다. 에네스 카야는 지금까지 좋은 가장이었고 이번 일로 그의 인생을 포기하게 내버려두기도 싫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우리들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급기야 에네스 사태를 파헤치려 하는 취재진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엄포를 내리기도 한다.

<저만큼 이번 일에 대해 진위여부를 밝히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에 대한 알권리는 제게 우선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법에 물어볼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방송에서 결론을 내리셨으니까요.>

이번 사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취재 중인 ‘한밤의 TV 연예’가 밤 10시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겁에 질린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껴안고 떨고 있었다.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최소한의 자비도 없는 테러 같은 취재 요구에 치를 떨었지만, 그 애처로운 호소문 또한 대중의 측은지심을 자극해 남편을 보호하려는 장치라 느껴져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만약 아내가 에네스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오히려 그의 면면을 밝히려는 한밤의 TV 연예가 그녀의 우방으로 자리잡지 않았겠는가.

또한 아내는 에네스만큼이나 모호한 표현으로 해당 사건의 본질을 뭉개버렸다.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은 에네스 카야에게 있다고 사과하면서도 피해 여성의 증언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남편이 그녀들을 오해하게 만든 점을 사과한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사과의 겉치레는 하되 일면 여성들의 주장이 오해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히 한 것이다. 이건 사과문을 가장한 일종의 경고다.

그녀가 정말 모든 책임이 에네스에게 있다고 한다면 피해 여성의 증언을 사실로 인정하고 사과한 뒤 이후 보상하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허위 사실 유포’라는 주장 아래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강경한 의지가 에네스 안에 있다. 이토록 체계적인 계산 아래 영리한 화법으로 피해 여성을 저격할 수 있는 에네스 카야의 부인은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우방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입을 모았던 에네스 카야의 부인이 정작 그를 위한 칼을 뽑았으니까.

드라마 불꽃에서 영민한 의사로 분한 조민수는 약혼자와 불륜한 내연녀를 만나 어느 문학도의 예시를 들어 ‘연인이 불륜한 죄가 만든 분노보다 상대 여성을 향한 질투에 불타올랐었다’고 고백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피해 여성이 ‘오해’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 채 남편을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에네스의 아내와 상대 여성을 ‘협박녀’라고 낙인찍은 남편 이병헌과 손을 맞잡는 것으로 결론을 맺은 이민정의 선택이 겹친다. 참 서글픈 여자의 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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