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찬값이 아닌 생활비를 벌러 마트에 나왔던 평범한 엄마 선희는 그 투쟁을 통해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의 무수한 '사회적 연대'를 <카트>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그 투쟁이 어찌하여 그런 발발과 과정으로 전개돼 그런 결과를 맺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투쟁이 있기 전 배달호, 김주익 씨가 잇따라 목숨을 던졌다. 인과관계는 아니겠지만, 분명 각별한 의미의 죽음이었다. ‘노동자들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된 시대였지만, 노동과는 동행하지 않겠다는 선고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죽음으로 투쟁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대통령의 말에는, 누가 굳이 말로 되받진 않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비감함이 삼켜졌다. 지금까지도 문제적인 비정규직법의 문제가 바로 그 때의 일이다. 그 마트 점거는 비정규직법 시행 하루 전날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다 설명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투쟁은 당시에도,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성립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고, 민주노총은 더 모르는 조합원”들이 벌인 500여 일간 파업이다. 수차례의, 수십 일 동안 이어진 매장 점거 투쟁은 극한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거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트 앞이었다. 하루를 버티기도 처절한 장소였다. 시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직접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론은 그들을 최소한 외면하지 않았고, 결정적 어느 순간에는 오히려 지지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그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진 않았다. 대부분의 투쟁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외면과 무관심 속에 사그라져 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투쟁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공론의 환기는 특별한 것이었다.

▲ 무수히 많은 사회단체 활동가들도 그 투쟁을 지지, 엄호했다. 그 '연대'의 힘은 성립될 수 없을 것 같던 조건의 파업을 500여일 동안 끌고 온 바탕이었다. (사진=참세상)

바로 그것. 그 관심과 환기야말로 그 투쟁의 ‘맥락’을 구성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어느 사업장의 문제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걸 개별 사업장을 넘어서는 문제로 받아들였다. 많은 이들이 ‘그녀’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전환해 인식하려 했다. 변화하는 사회 체계가 누구의 삶에라도 가해를 가할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지만 광범위했던 절박함. 그리고 그 노동의 변화가 넥타이를 맸건, 사장님이라고 불리건 가릴 것 없이 결국 저 밑단의 마트 아줌마들을 시작으로 우리를 엄습해 올 것이라는 정서의 공유. 그게 그 투쟁을 그렇게 대단하게 만들었다. 그걸 부르는 총합적인 이름은 아마 ‘연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투쟁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 싸움의 노조위원장은 훗날 그걸 “불편하다”고 했었다. 자신들이 했던 것은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아닌 ‘당장에 차비가 없고, 전기세가 없고, 생활비가 없던 문제’였다고도 했다.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한다. 그 ‘사람’의 문제를 말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 투쟁의 ‘의미’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해왔던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다시, 그 투쟁을 말하려면 양자의 균형과 긴장이 모두 다뤄져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아도 ‘소외’되는 어떤 사람들이, 조직이, 의미가 완전히 말소된 채 그저 그 ‘사람’들만 남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먹먹하면서도 불편했던 건, 영화가 그 ‘연대’에 관한 맥락을 완전히 거세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감독의 말대로 ‘여성들의 실존’이 거기 분명 있었다. 그 주체들의 싸움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 ‘여성들의 실존’을 지지했던 그리고 끝내 그 ‘실존’을 지켜주고자 했던 구체적인 이들의 ‘실존’이 사라졌다. 주인공과 주변의 구도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선희(염정아)와 혜미(문정희)의 연대는 분명 그동안 우리가 잘 주목하지 않았던 ‘자매애’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그들이 ‘자매애’에 이르는 과정까지 도약하게 된 것은 한 평범한 인간을 비범하게 만들어냈던 많은 이들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란 걸 영화는 간과한다. 선희와 혜미의 언니, 누나, 동생이 되어 함께 물대포를 맞고, 컴컴한 복도에서 두려움을 나눴던 수많은 이들의 ‘우애’를 <카트>는 끝내 언급하지 않은 채, 끝났다.

▲ 민주노동당은 구체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그 투쟁을 지원했다. 지역별 농성장이 설치됐고, 당시 홈에버 지점마다 투쟁의 거점들이 마련됐었다. 영화에는 물론 나오지 않는다. (사진=참세상)

물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를 구성하는 극적 요소와 현실을 구성했던 실제 요소들이 완벽하게 일치할 순 없고, 그 모두를 영화의 서사로 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영화니까. 오히려 다른 ‘찬사’도 있다. 영화를 기획한 심재명 대표는 애초 ‘여성들의 투쟁’에 주목했다고 했다. 부지영 감독 역시 ‘여성들의 실존’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착상과 시각을 나무랄 건 전혀 없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동시대에 존재할 까닭은 충분하고, 영화는 그 의도를 정확하게 그리고 솜씨 있게 살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착상과 시각에 기꺼이 동의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미덕이 부각될수록 굳이 애써 그런 것까지 말하지만 말자는 소심함에 빠져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소심함이야말로 어쩌면 그 이후 우리가 왜 계속 ‘패배’해왔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연대’가 지워진 채 그 투쟁이 그저 당사자들의 문제로, 그 당사자가 곧 당신일 수 있다는 일반론의 토대에서 전달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들의 실존’을 지켜주기 위해 활동을 기획하고, 투쟁을 조직하고, 지침을 하달했던 무수히 많은 우리 사회의 소위 ‘운동권’들은 그저 그렇게 그나마 이런 영화가 나온 게 어디냐고 겸허히 물러서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겠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조금씩 밀려서, 그걸 정면으로 말하는 것조차 왠지 모를 불편함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존재가 희미해져 오히려 전혀 다른 존재들로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카트>에는 민주노총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투쟁을 함께 했던 활동가들의 존재 역시 전무하다. 영화에 송경동 시인이 집회 사회자로 나오고, 정경섭 민중의집 대표가 단역으로 등장하지만, 그 뿐이다. <카트>는 그 투쟁을, 그 기억을 철저히 그 당사자들만의 기록으로 좁힌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선문답을 늘어놓는 순례여사(김영애)의 모습에선, 이 불편한 소재를 다루기 위해선 오직 그 당사자들의 전지전능함만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밖에 없다는 어떤 집착마저 느껴진다.

진부한 얘기지만, 영화는 사회적 과정이다. <카트>의 대본을 쓴 작가는 이 영화의 한 배경으로 ‘노동을 말하지 않는 언론’을 꼽았다. 노동에 대한 언론의 왜곡된 선전 속에서 영화가 저널리즘의 역할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해했다. <카트>는 정말 거기에 충실한가. 오히려 그 투쟁의 의미를 당사자들의 ‘삶 윤리’ 문제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방식이 또 다른 의미의 선전이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스럽다. 그 당사자들의 투쟁이 있었던 ‘바탕’을 생략한 채, 그 당사자들의 ‘여성성’만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어떤 의도였는가에 따라 이 영화의 의미는 좀 다르게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 당시 내려졌던 민주노총의 긴급지침. 노동의 문제와 노동조합의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그러나 민주노총의 존재를 아예 누락했다. 민주노총이 그 파업에서 적절히 대처했는가 그리고 정말 '총력'을 다했는가의 여부는 평가의 지점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를 지워버릴 일은 아니었다. (사진=참세상 기사 갈무리)

우리는 여전히 그 <카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에 액자 구조로 들어있던 청소년 알바 노동 문제는 단적이다. 영화가 개봉할 무렵, 아파트 경비 노동자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쌍용자동차 조합원들의 해고는 ‘자본의 긴박한 필요’에 의해 정당화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들을 '당사자'의 것으로만 치부하며, 그 당사자와 나와의 거리를 통해 그 문제를 파악하도록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카트>의 그 여성들에 ‘공감’한 누군가들이 정작 지금 여기 당장의 문제들에 시큰둥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카트> 이후의 세상을 설명하는데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연결고리가 바로, <카트>가 지워버린 그 ‘연대’의 문제는 아닐까. 구조의 문제를 불쌍한 개별 당사자들의 문제로 인지하도록 길들여진, 혹은 그런 검열을 거치게 된 표현만을 마주하게 된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으레 거기에 싸우고 있는 그 진짜 ‘주체’들을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노동 운동의 쇠락과 사회 운동의 정체에 관한 말들은 차고 넘친다. 그 ‘과’에 대한 평가는 야박할 정도로 많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의 의미성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은 결코 좋은 방식의 작법이 될 수 없고, 상황에 대한 왜곡이 될 공산마저 있다. <카트>의 그 현장은 노동 운동이 그리고 사회 운동이 어떻게 세상의 문제들과, 당대를 살아가던 삶들과, 그 존재들의 실존들과 ‘접점’을 찾았는지를 보여줬던 투쟁과 같았다. 왜 그게 ‘누락’됐는지, 사회적 연대를 실천했던 이들은 어찌해 ‘투명인간’이 됐는지 그게 끝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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