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늘 불시에 찾아든다. 어떤 죽음이든 당분간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해서 원망과 죄책감, 충격에 잠식되고 나면 진짜 슬픔에 젖어들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한참 뒤다. 잃어버린 사람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스며드는 상실감.

김자옥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 한참을 ‘실감 나지 않아’ 되뇌며 외면하다가 그녀가 남긴 대체할 수 없는 유산을 떠올리니 그제야 찾아드는 서글픈 상실감에 먹먹해졌다. 수줍은 미소, 목가적인 자태, 속살거리는 목소리. 우리는 만년 소녀 김자옥과 이별했다.

그러고 보면 2014년도에는 유독 실감 나지 않는 죽음이 많았다. 이제 막 피어나는 봉오리라서 더 애석했던 권리세와의 이별, 마왕이라 불리었던 사나이 신해철의 원통한 죽음. 계절이 급격하게 추워지던 시점에 김자옥을 잃고 나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녀가 아팠었다는 사실조차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폐암에 따른 합병증으로 별세한 배우 김자옥의 빈소가 16일 오후 서울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
언제나 꽃 같은 미소, 변치 않는 소녀 자태의 그녀는 도무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김자옥의 얼굴은 늘 생기 넘치는 화려한 미소였기에 투병중인 암환자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그리고 올해 초 방영된 ‘꽃보다 누나’에서 투병 사실을 고백한 김자옥의 발언이 새삼 화제가 되었다. 윤여정, 김희애, 이미연 그리고 이승기와 크로아티아 관광지를 찾은 김자옥은 이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누나였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두려움에 힘겨워했다고 한다.

2008년 대장암 수술을 받은 김자옥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오랜 기간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녀를 힘들게 했던 건, 육체의 고통보다 오랜 항암 치료에 지쳐가는 마음이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그녀는 늘 움츠러들어 있었고 위축된 채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 고통스러운 감정이 여행 전날까지도 남아있었다는 그녀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바꿀 계기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분명 우리가 눈치 채지도 못했던 오랜 기간을 고통에 젖어 있었다는 김자옥의 고백은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동료,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한 여행에서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또한 위안을 주었다.

김자옥은 그리 호들갑스러운 이미지의 연예인은 아니지만 신드롬에 가까운 돌풍을 일으키며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적인 신조어를 남겼다. 마치 고대 시절부터 쓰던 말인 것처럼 이제는 남녀노소 모두의 입에 익은 ‘공주병’이라는 단어를 확장시킨 사람이 바로 김자옥이었으니까.

MBC가 콩트의 거성이던 시절에 조혜련과 여고생을 연기한 그녀는 분명 소녀의 나이는 아니었지만 갈래머리에 단정한 하얀 카라 교복이 그럴 수 없이 잘 어울렸다. 거칠고 투박한 소녀들 사이에서 부뚜막에 앉은 고양이처럼 내숭을 떨며 멀쩡한 얼굴로 잘난 척을 하는 바람에 성질난 친구들이 학교를 때려 부수는 쇼맨십이 이 콩트의 백미였다.

‘공주병을 앓는 여학생 연기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견탤런트 김자옥이 공주병을 주제로 한 음반 <공주는 외로워>를 취입한다. 김씨는 이 음반에서 신철을 비롯한 인기 작곡가들의 노래를 부른다.’ 96년, 연합뉴스에 실린 탤런트 김자옥의 음반 취입 기사다.

크레파스 공주님 같은 연분홍 드레스에 왕관을 쓰고 살랑살랑 춤을 추며 ‘공주는 외로워’를 부르는 그녀의 주제는 해학이었지만, 한편 너무나 아름다워서 토를 달 수도 없었다. “나는 공주야.”라는 자찬을 아무리 쏟아내도 딱히 시비를 걸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타성에 젖기 쉬운 중년의 나이에 젊은이의 신조어를 확장시키고 거침없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녹슬지 않은 감성이 고운 얼굴보다 더 소녀다웠다.

언젠가 교수님이 말했었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이별하기 때문이라고. 망자와 산자가 죽음 이후에도 교제할 수 있다면 슬플 일이 무어가 있겠냐고. 우아함 속에 편안함이 있었던 만년 소녀 김자옥을 대체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상실감에 젖게 하지만, 죽음 이후에 되새긴 그녀의 얼굴에 하나 고통스러운 것 없이 꽃 같은 미소만 남아 또한 따뜻하다. 타인의 기억 속에 이토록 곱게 웃는 얼굴만을 남길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영원한 소녀 김자옥. 그녀의 소녀처럼 꽃다운 미소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수시로 만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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