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를 평정했던 90년대 토크쇼 중에 이홍렬 쇼라는 것이 있었다. 많고 많은 게스트와 오갔던 수많은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참참참 게임을 하다 망나니가 목을 따듯 이홍렬의 머리를 내리 찍은 김형곤의 뿅망치 파워와 신동엽의 의리 입담만큼은 기억한다. 나는 여태껏 그 이상의 훌륭하고 센스 있는 해명을 들은 적이 없다.

의 상한 이유는 한 사람 말만 들어선 모른댔다. 라디오스타에서 시작해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된 ‘류승룡 태도 변화 논란’에 대해 “그럴 성격을 가진 분이 아니다.”라고 정색하는 소속사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니 ‘방송을 안 봤구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타인에게 걸러 들은 내 얘기의 파급력이 이렇게나 무섭다.

방송에서 만들어진 연예인의 구설수가 논란이 되는 이유의 절반은 뜻밖에 방송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타인에게서 그날의 일을 건네 듣거나 기사의 헤드라인만 접하고 분노하기 때문이다. 정작 방송을 본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데 남에게 건네 들은 말로 흥분하는 이들이 사사로운 해프닝을 일명 사건이나 논란으로 확대 재생산해 버린다.

‘어떤 톤으로 이야기한 것인지 확인해보겠다.’는 소속사의 변을 보면 정말 방송을 안 봤구나 싶다. 차후에 확인했대도 이미 경계한 상태에서 점검하듯 살폈으니 오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사나 타인, 제3자에게 전해 들으면 김원해와 이철민이 양껏 과거의 절친 류승룡을 뒷담화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방송의 뉘앙스는 분명 폭로가 아닌 배려였다.

김원해, 이철민, 이채영, 김뢰하. 아직 대중에겐 낯설 수도 있는 이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해치지 않아요’ 특집은 배우 특유의 희극 요소를 겸비한 몰랑몰랑한 감동이 있었다. 무명 시절의 서러움과 연기에 대한 열정이 두당 한 잔의 아메리카노 썰 위에 펼쳐졌다. 한 배우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렇게 좋았던 방송의 끝머리 즈음 라디오스타가 투척한 미끼 하나가 이날의 훈훈함을 구설수로 변질시켜 버렸다. “김원해 씨가 난타 초기 멤버예요?” 김국진의 순진한 질문에 라디오스타의 자막은 굳이 그가 하지도 않은 ‘원해! 류승룡과 <난타> 초기 멤버라고?’를 덧붙인다. “아, 그러세요오?” 눈을 반짝이던 김구라가 이간질의 불을 지폈다. “류승룡 씨하고는 자주 연락을 하는지?”

“지금은 못해요. (승룡이가) 워낙 이렇게 높아가지고.” 이야기가 왜 이리로 튀었나 싶어 다소 머쓱한 얼굴의 김원해가 더듬더듬 일러준 것 또한 폭로의 뉘앙스는 결코 아니었다. 김원해가 얼마나 류승룡을 배려하고 있었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류승룡 측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 게 아니라 본인이 그에게 연락을 못한다고 자책했던 점이다.

그러자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원하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이끌기 위해 살을 붙이는 김구라. “아, 얼마 전에 박동빈 씨도 그러더라고? 같이 옛날에 했는데 요즘엔 연락을 안 한다고.” “아 라미란 씨도 그러잖아! 연락이 안 된다고! 속속 증언이 나오고 있어어~” MC들의 말마따나 싸움 붙이기 대장인 김구라가 건수를 물었으니 오죽 재밌었을까. 폭로를 원하는 김구라에게 김원해는 그저 난처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끝까지 옛 친구의 편을 들어주었다. “승룡이도 여기저기 전화 많이 오겠죠.” 입지가 달라져 하루에도 수많은 전화가 쏟아질 테니 모두 응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변이었다.

“아, 이철민 씨는 친해요?” 포기할 수 없다는 김구라가 포커스를 그에게 맞추자 덤덤한 얼굴의 이철민은 대학 시절엔 사귄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친했던 사이지만 현재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화번호가 바뀌어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노라고. 언젠가 시사회에서 류승룡과 마주친 그가 “야, 승룡아. 너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몇 번이니?”하고 묻자 “나 전화 잘 안 받는데?” 시크하게 던지곤 돌아섰다는 류승룡의 일화.

논란이 생긴 대목이긴 하지만 이것 또한 ‘따로(사적으로) 연락을 하는지?’에 대한 MC들의 집착적인 추궁이 부른 화였다. 예능 경험이 거의 없는 이철민과 김원해에게 능구렁이 같은 대응을 기대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사실 이날 류승룡의 화제는 라디오스타의 주요 주제도 아니었고 장시간의 토크 소재 또한 아니었다. 그저 프로그램 말미에 슬쩍 던진 미끼에 낚인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한 질의 응답에 불과했다. 다소 서운할 수 있는 대목에서도 김원해는 끝까지 “그럴 수 있어요. 승룡이 입장에선 그럴 수 있어요. 저희가 안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라고 자책하며 배려했다.

이간질의 형국이 되었지만 김구라나 윤종신을 비롯한 MC들의 질문 또한 딱히 심하다고 나무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라디오스타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에서 쉽사리 찾을 수 있는 밑밥 던지기의 일종일 뿐이었다. 이에 대해 ‘방송에서 나온 대로 그런 성격을 가진 분이 아닌 건 확실하다.’라고 ‘발끈’했다는 소속사의 대응은 다소 지나치다.

물론 해명 그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3분가량의 질의응답이 농담 수준이었대도 이만큼 논란이 되었으면 충분히 공격적인 폭로의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 대 개인이 아닌 한 배우를 케어하는 소속사의 입장이라면 보다 센스 있는 대응으로 소속 배우를 지키는 것이 영리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이 앞선다.

필자가 글 첫머리에 인용한 신동엽의 해명이 떠올랐던 이유다. 오래전 신동엽 또한 MC 이홍렬에게 서울예전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안재욱의 화제를 전해 들었다. 드라마 짝에서 귀여운 남동생 이미지에 불과했던 안재욱이 ‘별은 내 가슴에’의 위력으로 한껏 위상을 얻은 시점이었다.

그야말로 자다 깬 신데렐라였던 데다 요즘 같이 해명할 기회가 널린 인터넷 또한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라 이런저런 구설수 또한 많았다. 그 중 꽤 치명타였던 것이 ‘뜨고 나니 변했더라.’라는 초심 논란이었다.

이때 신동엽은 이홍렬이 굳이 시키지도 않은 질문의 답을 했다. 안재욱이 뜨고 나서 변했다, 초심을 잃었다, 건방져졌다는 말이 많은데 그 친구는 예전부터 건방졌다고. 아, 이 얼마나 센스 넘치는 답변인가. 순간 웃음이 터지며 신동엽은 물론 안재욱에 대한 호감도까지 120퍼센트 상승했다.

“그 친구는 대학 시절에도 건방졌고 신인 시절에도 건방졌어요. 초심을 잃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건방졌던 친구예요.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건방졌을 거예요.” 어찌 보면 디스인데 헐뜯는 말 속에 오히려 성공한 친구를 시샘하는 무리에게서 보호하려는 진한 우정이 느껴졌다. 이 방송의 파급력 덕분에 한껏 오해 받던 안재욱에 대한 반응이 급속도로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신동엽의 센스에 버금가는 해명을 접한 적이 없다.

류승룡의 소속사 또한 정색한 항의가 아니라 영리한 해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그날 출연한 김원해, 이철민의 일화만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류승룡의 태도 논란은 연예계에서 드문드문 출몰하는 화젯거리였음이 분명하다.

이에 소속사가 정색하지 않고 류승룡의 이미지를 닮은 신사적인 유머로 상황을 모면했더라면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지도 않았을까. 그의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이철민에게 류승룡이 출연하는 CF의 이름을 들먹이며 ‘배달의 민족에 전화해보세요.’라는 윤종신의 센스 넘치는 답변처럼.

대중이 품은 류승룡에 대한 판타지는 서글서글하고 유머러스한 여유로움이다. 이에 소속사의 정색한 대응은 ‘내 전담 변호사와 얘기하세요.’라고 잘라 막는 차도남 같아 어쩐지 껄끄럽다. 그가 범접할 수 없는 스타라는 위치를 재확인 받은 느낌이다. 3분도 채 안 되었던 이철민, 김원해의 토로보다 소속사의 발끈한 대응이 오히려 스타 배우의 이미지에 살을 보탠 것 같아 어쩐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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