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널 사랑해>, <내 생애 봄날> 그리고 현재 방영 중인 <미스터 백>까지 MBC 드라마가 다시 '드라마 강국'으로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시청률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거의 동시간대 1위를 수성했으며, 화제성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조기종영된 <개과천선> 이후, 연이어 방영되고 있는 세 드라마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닮았다.
'지상파 드라마의 중요 요건'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상파 드라마는 주인공이 재벌이어야 하고, 그 재벌이 사랑하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케이블에서 화제리에 방영되고 있는 <미생>이 왜 지상파에서 방영될 수 없었는가를 두고, 원작자 인터뷰까지 떴었다. 물론 <미생>의 경우 애초 재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지만, 그놈의 '사랑'이 지상파 방영의 제약 요소로 작용한 것을 보면 저 우스갯소리가 빈말만은 아닐 듯싶다. 그런데, 이 농담 같은 진담을 충실히 수행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운명처럼 널 사랑해>로부터 시작된 MBC 수목드라마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재벌 남자 주인공들이 사실 무슨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회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드라마에서 그들의 갖가지 사업은 그저 그들이 재벌이라는 증명서에 불과할 뿐이요, 그들의 주요 업무는 여주인공과의 사랑이니까.
재벌인 그들에겐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각자의 아킬레스건이 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이건은 가문 대대로 30대를 넘지 못하고 요절하는 건강상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내 생애 봄날>의 강동하는 사랑하는 아내를 사고로 잃은 마흔 중반의 홀아비이다. <미스터 백>은 한 술 더 뜬다. 이제 막 고희연을 치룬 70노인이니까. 이렇게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이들이기에 평범한 여주인공을 만나 동등하게, 때로는 그녀들보다 비굴한 위치에서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 생애 봄날>의 여주인공 이봄이(수영 분)는 상위 1%에 속하는 집안의 딸이지만, 대신 심장이식을 한, 건강상 보통 사람들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있다. 장나라라는 동일한 배우가 열연하는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김미영과 <미스터 백>의 은하수는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정규직을 갈망하는 인턴사원이다. 이른바 대한민국의 88% 세대이다.
이들의 전작 <개과천선>이 로펌을 배경으로 법정 앞에 선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해부했던 것과 달리, 그 이후 방영된 이들 드라마들은 2014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재벌과 인턴사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지만 사실 이들 드라마 그 어디에도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실은 없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2008년 대만에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배경은 2014년 대한민국이고, 극 중에서 섬 개발을 둘러싼 이권 다툼을 벌이고, 여주인공은 직업을 얻기 위해 고심하는 인턴사원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이런 요소는 그리 큰 장애요인이 아니다. 남주인공이 섬 개발을 둘러싸고 반대 투쟁을 벌이는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섬으로 가지만, 그것은 그저 두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여주인공의 인턴직도 마찬가지다. 해프닝과 같은 하룻밤으로 임신하게 된 여주인공은, 2014년 트렌드와 어울리지 않게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 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이 드라마의 주된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내 생애 봄날>의 경우 이미 2003년에 방영된 손예진 주연의 <여름향기>에서 비슷한 설정의 이야기가 방영된 바 있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이식받은 그녀를 만난 그 순간부터 심장이 떨리기 시작한 남자, 그리고 역시나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심장을 이식받은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십여 년 전에 했던 방식이다. 2012년 성폭행 사건을 다룬 사회적 멜로를 다루었던 이재동 감독은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14년, 사회적 의식이 탈색된 순순한 사랑 이야기 <내 생애 봄날>을 가지고 돌아왔다.
<미스터 백>에서 나이든 주인공이 젊어지는 것은 이미 고전이 된 서사 방식 중 하나이다. 지난해 영화 <수상한 그녀>가 할머니의 회춘을 다루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미스터 백>의 최고봉 할아버지는 운석 조각의 도움을 받아 젊음을 얻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테니까? 시청률이 잘 나올 거 같아서? 이런 노림수가 들어맞았는지 <운명처럼 널 사랑해>, <내 생애 봄날>, <미스터 백>은 시청률 면에서 동시간대 1위를 하기도 했고,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화제성에서 사람들의 대화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여전히 돈 많은 재벌들의 사랑 이야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난한 아가씨가 당당하게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하지만 10년 전에 해도, 지금 해도 별 다르지 않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관심을 끌고 있는 이들 드라마들을 보며 울고 웃다 슬그머니 허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드라마에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 등이 주는 찐한 현실에의 공감과 감동을 느낄 수 없어서는 아닐까? 왜 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접하는 '지상파'라는 공중의 이기는 현실과 가장 괴리된 '판타지'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이런 '판타지'성 사랑 이야기들이 최근 진행된 MBC 교양국의 해체의 또 다른 이면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은 그저 과대망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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